성경공부/마태복음

마태복음 23장 매튜헨리 주석

별을 보며 2022. 10. 3. 15:35

 

출처: 매튜헨리 주석

23:1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정죄하심 (마태복음 23:1-12)

 

그리스도는 이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것만큼 더 혹독하게 설교하신 일이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교만과 세속과 폭력을 종교라는 허울로 가장했던 그 시대 사람들의 기질과 행동보다도 더 복음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어긋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성들의 우상적인 존재였고 또한 신임을 받았으며, 백성들은 두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그들 중 한 사람은 반드시 바리새인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많은 무리들과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이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본색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들을 시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무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해 가지는 편견 된 생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은 백성의 지도자로 자청하는 교회원들에 의해 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들은 위대하거나 권세 있는 이름들, 명칭들 또는 허울 좋은 세력들에 의해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참 성격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를 알기 위하여 "이리"(20:29, 30). "개들"(3:2), "가장하는 자"(고후 11:13)에 대하여 들어야만 한다. 잡다한 군중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이러한 경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도 세상의 허세에 자신들의 눈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직무가 율법을 해석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모든 산헤드린 회원. 그들은 교회 행정의 요직에 앉아 있었고 모두 "서기관"이라고 불리웠는데,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다)은 율법의 공적인 교사와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2). 또한 모세의 율법은 그 나라의 법이었으므로 그들은 곧 심판자요 공의의 재판관들이었다. 역대하 177, 9절과 역대하 195, 6, 8절을 비교해 볼 때, 가르치는 일과 재판하는 일은 동등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말을 타고 다니는 순회 판사는 아니었으나 재판석에 앉아서 율법에 다라 여러 가지 청원을 받고 특별한 답변도 하며 오류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중보자로서가 아니라 최고 재판관(18:26)으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율법을 해석하고 특별한 사건의 경우에 율법을 적용하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것은 산헤드린이 아니다 다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기 위해"(8:4) 에스라를 위하여 만들어졌던 것과 같은 "나무 강단"이 여기에서 모세의 자리라고 불리웠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이것들을 각 성에 두어(이와 같은 표현이 행 15:21 에 있다)그 강단에서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임무였으며, 의롭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백성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해야만"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였다(2:7).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많은 훌륭한 자리에는 악인으로 채워져 있다. 가장 사악한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이 그 자리에 의해 명예롭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자리가 사람들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은 매우 지독하게 타락했기 때문에 다른 자리를 세우기 위하여 모세와 같이 위대한 선지자가 일어나야만 했다.

2. 훌륭한 여러 직분들과 권력들이 악인의 손에 넘어가 남용된다고 해서 그 직분과 권력들이 정죄되거나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 그것보다는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자"(13:30).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추론하고 계시다(3).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즉 모세에 의해 주어진 율법을 읽고 전파하는 한 그렇게 하라(그러나 이것은 온갖 힘과 정열을 기울여 계속되어야만 한다)." "그 율법대로 판단하라. 너희는 그들에게 경청하는 것만큼 기록된 말씀에 대해 기억해야만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그들의 임무로 하였으며 또한 성경의 언어와 역사와 습관 그리고 그 문체와 어법 등에 대하여 잘 알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르친 것들 중에서 도움이 되는 것들을 이용하고 이를 행할 것을 원하셨다. 그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왜곡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계명"을 분명히 하고 "무효화시키지" 않는 한 이를 행할 것을 원하셨다. 그 계명들은 잘 준수되고 이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주위를 기울이고 신중하게 판단하여 준수되고 이행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위대한 진리가 나쁜 사역자들에 의하여 가르쳐진다고 해서 그 진리가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좋은 법칙들이 나쁜 통치자들에 의해 집행된다고 해서 그 법이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사들이 우리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시켜 깨끗하고 좋은 음식을 가져다주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먹어야만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에 계속되는 말씀을 책잡으려고 하는 간계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미리 하고 계시다. 마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정죄 하심으로써 그는 모세의 율법을 경시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거기에서 떠나게 하려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신 것은 그것을 "폐하시려고 하심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하심"인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특히 사역자가 비난을 받을 때 "그 직분이 비난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과 그 직분 사이를 구분해야 할 경우가 있을 때에는 올바른 비난에 대해 취해질 수 있는 이의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 그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계시다. 그는 그들이 가르친 대로 행할 것을 무리들에게 명하셨으나, 여기에서는 그들이 행한바 대로는 행하지 말 것을, 즉 그들의 누룩을 조심할 것을 첨가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저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그들의 전통은 그들의 일이었으며, 그들의 우상 즉 그들의 상상적인 일이었다. 또한 "저들의 본을 따르지 말라." 교훈과 실제는 시험되어져야만 하며 또한 어떤 경우가 있을 때에는 주의 깊게 구별되고 구분되어야만 한다. 가르치는 자들에게 칭찬할 만한 실제 생활이 있다고 해서 부패한 교리를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이와 마찬가지로 나쁜 모본을 보이는 자들에게 그럴듯한 교리가 있다고 해서 그 나쁜 모본들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교훈이 정통적임을 자랑하는 만큼 그들의 행위가 선하다는 사실을 자랑하였으며 또한 그들에 의해 의롭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했던 기원이었다(18:11, 12). 그리고 그들 자신이 그렇게도 높이 평가했던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에서와 다음 구절에서 우리가 모방하지 말아야 할 여러 가지 특별한 일들을 분류하고 계시다. 대개 그들은 종교적인 위선과 기만, 이중성 때문에 책망을 받고 있다. 이러한 죄는 사람의 법정에서 심문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오직 외모를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위선을 정죄 하실 수 있으시다. 위선보다 더 그를 불쾌하게 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1. 그들의 말과 행동은 별개의 것이었다. 그들의 실제 생활은 그들의 가르침이나 말에 결코 부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으로부터 선한 것을 가르치지만 그들의 대화는 거짓 투성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과는 다른, 하늘에 이르는 길을 찾은 것같이 보인다. 그들을 실례로 들어 고소하는 것에 대해 살펴 보라(2:17-24). 다른 사람을 들어 정죄 하는 죄 가운데 스스로 빠져 그러한 죄를 짓는 자 들이야말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이 말씀은 특히 사악한 교역자들에게 직접 해당되는 말씀인데, 이들은 위선자들이 받는 형벌을 확실히 받게 될 것이다(24:51). 자신들은 믿지 않고 불순종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고 행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것보다 더 큰 위선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가르치면서 쌓아 올린 것을 실제로 생활하면서 무너뜨린다. 강단에서는 설교를 잘하지만 실상 밖에서는 형편이 없으며, 또한 강단 밖에서는 사악하게 살지만 안에서는 그럴듯하게 사는 자들이야말로 한심한 자들이다. 이는 마치 다른 사람을 부르지만 그 자체가 매달려 있는 종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수은 기둥은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해 주지만, 여전히 그것 자체는 서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입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심판은 말하고 행치 않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럴듯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그 신앙고백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나 좋은 약속을 했지만 이를 실행하지 않는 자는 좋은 말을 하고 법에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선한 행위는 전혀 없는 사람이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지만, 손은 에서의 손이다." Vox et pra terea nihil즉 단순한 소리이다. 그들은 분명히 "아버지여 가겠나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을 믿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일곱 가지 가증한 것들이 있다."

 

2. 그들은 그들 스스로 가지기를 싫어하는 그러한 것들(4)을 다른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지웠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스스로 지기는 싫어한다." 그들은 "멍에"(15:10)라고 불리우는 율법의 사소한 부분까지 주장하였고 또한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이 행했던 것보다 더 엄격하고 혹독하게 그것들을 준수할 것을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한편 율법사들의 격언은 Apices uris non sunt jura 즉 율법의 사소한 요점들은 율법이 아니다), 그의 말들을 첨가하고 그들 자신의 의도와 전통을 부과함으로써 그들을 최고의 형벌 아래에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나타내며 또한 자신들의 지배력을 과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하나님의 선민을 지배하고 다른 사람의 영혼더러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머리를 숙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제 4계명에 여러 가지를 첨가하여 증거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안식일을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자기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저 목자들은 옛날과 같이 난폭하고 잔인하게 "양 무리를 다스렸다"(34:4)

그러나 저들의 위선을 보라.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였다."

 

(1)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부과한 것들을 자신들은 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저희 자신들은 종교상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공공연하게 강요한 자신들의 전통을 은밀하게 범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함으로써 자만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의 행위에 있어서는 안락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사제들을 비난하는 말 가운데, 일반 사람들에게는 빵과 물로 금식하라고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포도주와 고기로 금식한다는 말이 있다. 또한 그들은 백성에게 회개를 명하면서 자신들은 거절해 버린다.(2) 저들은 이런 일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줄 알면서도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이들의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나타나 있는 허술한 의미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덧붙인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도 완화하려고 하지 않고 가장 미세한 점에 있어서도 철저히 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반적인 법의 극단적인 점을 완화시킬 수 있다. 어떤 형평법(chancer)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실제 생활과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그 사도들은 누리려고 하지 않았던 자유를 교화의 평화와 교회를 위하여 모든 기독자들에게 이를 허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요긴한 것들 이외에는 다른 아무 짐도 지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들은 쉬운 것이었다(15:28).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얼마나 아꼈는가!(고전 7:28; 9:12)3. 그들은 종교상 보이기 위한 것일 뿐, 실질적인 것은 없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우리는 이러한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그것들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스스로 영광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행을 알려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전에 기도하고 구제하는 일을 특별히 예로 들어 책망하신 것처럼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책망하고 계시다. 그들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었으므로 "육신적으로 자랑하기 위하여" 그들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보여져야만 했다. 사람의 목적에서 종교적인 의무를 다함에 있어서 저들만큼 꾸준하고 충실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들의 영혼이 놓여있는 곳에서, 자신들의 골방과 마음의 깊은 곳에서 그들은 용서받기를 원하였다. 경건의 "모양"이 그들로 하여금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지게 했을 것이며, 이것이 그들이 노리고 있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제적으로 생명에 있어서나, 필수적인 경건의 ""에 대하여는 고심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지 보이기 위해 하는 사람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헛일을 하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행했던 일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그들은 차는 경문을 넓게 하였다." 경문은 종이나 양피지의 작은 두루마리로, 그 안에 율법 중에서 네 구절(13:2-11; 13:11-16; 6:4-9; 11:13-21)이 매우 정교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경문은 가족으로 꿰매어졌고, 앞 이마나 왼팔에 붙였다. 이것은 장로들의 유전으로써, 출애굽기 139절과 잠언 73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은 상징적인 것으로 보이며, 단지 눈동자를 지키는 것처럼 매우 주의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마음에 깊이 두어야 한다는 의미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경문을 넓게하여 다른 누구보다 더욱 율법에 거룩하고 엄격하고 열심히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였다.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더욱 거룩하게 되길 갈망하는 것은 아름다운 포부이지만 단순히 그렇게 겉으로 나타나기만을 바라는 것은 교만한 생각이다. 참된 경건에 있어서 탁월하게 뛰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겉으로만 뛰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를 지나치는 것은 당연히 그 의도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27:14). 외적인 봉사에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수선을 떠는 것은 바로 위선의 태도이며 또한 영혼에 대한 사랑과 성향을 입증하고 개선하는 일에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수선스러운 것도 위선적인 태도인 것이다.

 

(2) "그들은 옷 술을 크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옷에 단이나 술을 만들라고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그들을 이방 민족들과 구별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자신들은 특수한 민족임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들라고 명령한 대로 만든 백성들의 옷 술에 대해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보통 사람들 것보다 훨씬 크게 만듦으로써 자신들을 돋보이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경건하게 보이도록 하였다. 그들은 경문을 달고 옷 술을 크게 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옹색하였고 또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빈곤하였다. 그들은 이웃을 속일 수 있었지만 결국은 자신들을 속이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남보다 으뜸이 되거나 뛰어나기를 매우 좋아하였으며 또한 그 점을 매우 뽐내었다. 교만은 바리새인들을 미혹케 하였던 주요한 죄였으며, 또한 "그들을 가장 쉽게 공격할 수 있었던 죄"였다. 우리 주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4) 그는 그들의 교만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6, 7).[1] 그들은 영예와 존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다. "잔치나 회당"과 같은 공공적인 장소에서 그들은 "상석과 상좌에 앉기를" 기대하였고 또한 기꺼이 거기에 앉았다.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을 대신하였으며, 또한 저명한 인사나 공로자처럼 상석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이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상석을 차지했는가를 상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으뜸 되기를 좋아하였다"(요삼 9). 저들이 책망을 받는 것은 상석을 차지했거나 상좌에 앉았기 때문이 아니라(누군가가 상좌에 앉아야만 한다), 그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상석에 앉거나 앞서 가거나 길을 양보하지 않거나 좋은 대접을 받는 것과 같은 하찮은 의식에 가치를 두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것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찾으며 그것을 받지 못했다고 화를 내는 것은 모두가 자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게 될 때 자신은 넘어져 그것을 숭배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악한 우상 숭배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사악한 일이요. 특히 회당에서는 더욱 사악한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겸손해야 할 ""에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면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그를 조롱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다윗은 기꺼이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상좌"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았다(84:10). 사람들이 교회에서 훌륭하게 보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못한다면 교회를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다분히 교만과 위선의 냄새를 풍겨 주는 일이다.[2] 그들은 영예와 존경의 칭호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자기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또한 거리에서 사람을 만날 때 그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것은 그들을 즐겁게 했으며, 또한 헛된 소문, 즉 이분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지목을 받고 이야기되는 것을(digo monstrari et dicier Hice st) 간절히 소원하였다. "다 물러서라. 바리새인이 이곳으로 오신다"라고 말하면서 시장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며 "랍비, 랍비 !"라고 고귀하고 영예스러운 칭호로 불리워지기를 소원하였다. 이런 것이 그들에게는 고기요, 음료수요 진수성찬이었다. 느부갓네살이 그의 궁전에서 "이것이 내가 세운 큰 성 바벨론이 아닌가?"라고 말한 것과 같이 이것에서 그들은 큰 만족을 느꼈다. 이러한 "인사들"도 만일 시장에서가 아니라면 절반 정도밖에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과 같은 곳이라야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존경을 받으며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가를 뽐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 시대 바로 직전부터 이스라엘의 선생인 유대 교사들은 "랍비, " 또는 "라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그 뜻은 "위대한 또는 많은"이다. 또한 이 칭호는 "선생님" 또는 "내 주"라고 해석되었다. 그들은 이 칭호에 대해 매우 강조를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격언으로 만들어 "자기 선생에게 인사하면서 그를 랍비라고 부르지 않는 자는 신적인 위엄을 이스라엘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훌륭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대치해 버렸다.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게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랍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칭호를 좋아하고 요구하며 즐겨 사용하며 그런 칭호에 자부심을 느끼며 그런 칭호를 생략하면 불쾌하게 여기도록 가르치는 자는 범죄자요 가증한 자이다. 그러한 사람은 가르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학교의 첫 과목인 겸손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2)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제자들에게 저희들과 같이 되지 말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그들은 저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불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는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8절 이하). 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1] 교만의 금지. 그들은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하지 말도록 금지되고 있다.

 

첫째, 영광과 지배의 칭호를 얻으려고 하지 말 것(8-10). 이것은 두 번이나 거듭 되풀이되고 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주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자들에게" 세상적인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 아니, 그것은 존경심을 나타내는 한 실례로써 그것들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러나,

 

1.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방법으로써 "랍비""선생"이라는 명칭에 매혹되어서는 안 된다. 왕궁에 있는 자들이나 받아야 할 그러한 영광을 탐내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의 단순성에 어울리지 않는다.2. 그들은 그러한 이름에 내포된 권위나 지배력을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마치 그들이 기독자의 신앙을 지배하는 것처럼 그들의 형제들이나 하나님의 선민에 대해 지배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역자들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모든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 외의 일들에 있어서 사역자들은 그들의 견해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규칙이나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으로 인정된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렇게 금지된 이유는(1) "너희 선생님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이시기"(8) 때문이다. 또 한 번 이 말씀이 언급되고 있다.(10).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1]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시오, 선생이시오, 지도자이시다. 죠지 허버트(George Herbert)씨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 "언제나 나의 선생"이라는 말을 더 첨가하였다.[2]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선생이시며, 사역자들은 학교의 안내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만이 선생이시오, 위대한 선지자이시며, 우리는 그에게서 들어야만 하며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계시가 되고 법이 되어야만 한다.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란 구절이 우리에게 충족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만일 오직 그만이 우리의 선생이 된다면 그의 사역자들이 명령하는 자로 자처하거나 지고자나 무오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누구에게도 허락지 않을 그의 영광을 감히 빼앗아 버리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2) "너희는 다 형제니라." 사역자들은 서로에 대해 형제가 될 뿐만 아니라 백성에 게대해서도 형제가 된다. 따라서 그들의 형제 이외에 지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선생이 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동생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큰 형님이 "위엄과 능력의 탁월함"(49:3)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재배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8:29)이 되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동일한 선생의 제자들이므로 형제들이다. 학교 동창들은 형제이며, 따라서 그들은 학과를 배우는데 있어서 도와야만 한다. 그러나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 선생의 자리를 차지하여 학교를 다스리는 일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두 형제라면, 우리는 "많은 선생들"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3:1).

 

둘째,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칭호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되고 있다(9). "땅에 있는 자들을 아비라 하지 말라. 사람을 너희 종교의 교주로 삼지 말라. 즉 종교의 기초자요 창시자요 명령자요 지배자라고 하지 말라."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는 "아버지로 불리워져야만 하며," 또한 "그들에게 존경을 드려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우리 영혼의 아버지"로 인정이 되어야만 한다(12:9). 우리의 종교는 어떤 사람에게서 유래되거나 또는 의지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영적이고 신적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썩어질 씨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이며,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의 뜻이 우리의 종교의 근원이 되지 못하므로 종교의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jurace in verba magistri 즉 어떤 피조물의 명령을 지킬 것을 맹세해서는 안 되며, 즉 가장 현명하거나 훌륭한 사람의 명령을 지킬 것을 맹세해서는 안 된다. 또는 우리의 신앙을 어떤 사람의 옷자락에 매달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어디로 그것을 가져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회심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고전 4:15; 10). 그러나 그가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들을 지배하려거나 어떤 권위를 나타내려고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은혜를 입은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고전 4:14). 그 이유는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니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근원이시며, 설립자이시며, 그 생명이시며, 그 주인이시다. 근원자이신 그에게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유래되며 또한 의지된다. 하나님은 "모든 빛들의 아버지"(1:17)이시며, "그 한 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은 유래되었으며 우리는 그 안에 있는 것이다"(4:6).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것을 가르치셨으므로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고 부르지" 말도록 하자. 사람을 아비라고 부르지 말자. 왜냐하면 "사람은 벌레이며 사람의 아들"도 동일한 바위에서 우리들과 함께 쪼개어진 "벌레"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땅에 있는" 자라고 한 것은 땅에 있는 사람이 범죄한 벌레이기 때문이다. 땅에는 선만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버지"라고 불리우기에는 합당치 않다.

[2] 여기에는 겸손한 상호 복종에 대한 교훈이 있다(11). "너희 중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그 자신을 그렇게 부를 뿐만 아니라(우리는 그 자신을 Serservorum Dei즉 하나님의 종들 중의 종이라고 하면서 랍비나 아버지, Dominus Deus noster즉 우리의 주 하나님으로 행동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약속으로 여기라. "복종을 가장 잘하고 봉사적인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간주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최고의 지위에 앉게 될 것이다." 또는 교훈으로 여기라. "교회에서 위엄과 신망과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로 하여금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게 하라." (어떤 사본은 evstai 대신에 e;stw로 읽고 있다). "그러한 자로 하여금 영예의 특권이 안락한 생활의 보장이라고 생각하지 말도록 하라. 아니, 가장 위대한 자는 지배자가 아니라 봉사자이다." 자신의 의무와 특권을 알고 있었던 사도바울은 비록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전 9:19)고 하였다. 우리 주님께서는 종종 그의 제자들에게 겸손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온유하고 겸비하며 또한 비록 비천한 가운데 처할지라도 기독자의 사랑의 직무들을 풍성하게 다할 것을 강조하셨다. 또한 이것에 대하여 그는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 주셨다.[3]

 

여기에는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제시되어 있다(12).  

몇 가지로 생각해 보자.

 

첫째, 교만한 자에게 해당되는 형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신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목적에서 낮아질 것이요, 스스로 그런 일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세상 앞에서 낮아지게 될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극도로 교만하게 되었을 때 짐승들과 함께 거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고, 헤롯은 버러지의 좋은 먹이가 되고 말았으며, 여왕과 같이 군림하던 바벨론은 만국 중에서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우쭐대는 제사장들을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자로 낮추셨고(2:9) 거짓말하는 선지자를 "꼬리"가 되게 하셨다(9:15). 그러나 만일 교만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낮추어짐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 마지막 날에는 "영원한 수치와 멸시를 받게 될 것이다"(12:2). "여호와께서는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실 것이다"(31:23).

 

둘째, 겸손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높임(preferent).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겸손은 "하나님 보시기에 값비싼 장식품"이다. 이 세상에서 겸손한 자는 거룩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영예를 가지고 있다. 또한 현명하고 선한 모든 사람에 의해 존경함을 받는 영예를 가지고 있다. 또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종종 가장 영예스러운 봉사를 하도록 불리움을 받는다 .왜냐하면 명예는 그림자와 같아서 쫓아가 잡으려고 하는 자에게서는 피해 도망가 버리며, 그것을 피해 달아나는 자에게는 그를 뒤따른다. 어쨌든 저 세상에서 완전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형제들에게 겸손하여 스스로 낮추는 사람들이 높임을 받아 영광의 보좌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며, 또한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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