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29

예수님은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복음을 모두에게 선포하라고 말씀하셨다.구원받기로 정해진 사람을 부르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 아니다.정해진 소수의 사람에게만 필요한 복음이라면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을 것이다.왜냐면 지옥으로 가기로 정해진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해서목숨을 버리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2024.11.02

개혁주의 설교자가 정직하다면...

개혁주의 설교자(전도자)가 정말 제한 속죄에 대해 정직하게 믿는다면 그는 자기의 ‘복음’을 다음과 같이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매우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구원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해 자신의 사랑을 주시는 것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죄들을 위한 화해 헌물이시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대신 죽으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기쁜 소식을 가져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만일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지만만일 당..

칼빈주의 2024.11.02

예지 예정(미리 아심에 따라 선택)?

예지예정이라도 믿을 사람이 미리 정해진 것은 변함이 없다.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무작위로 만드셨는데믿을 사람과 믿지 않을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을 인지 하지 못하실이가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미리 아심은 칼빈의 교리와 다름이 없다.성경을 자세히 보면 '미리아심'은 이미 믿은 사람을 미리 아신 것이다.하나님은 믿는 사람을 가장 먼저 아신다.이는 믿는 사람 자신 보다도 먼저 아신다. 다시말해 개인의 믿음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다.그것을 아신다.그들을 선택하여서 성령의 구별하심과 예수님의 피 뿌림에 이르게하며순종에 이르게 하신다.

칼빈주의 2024.10.19

미리 아심

칼빈의 창세전 예정론은 인간을 믿을 영과 믿지 않을 영을 결정하고 지으셨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은 믿음의 선택이 애초에 봉쇄된 인간들을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상 이는 말이 안되는 것이다. 저주의 영혼을 만드시는 슬픈 일을 계속하셨던 것인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속성을 주지 않는 영을 창조하시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진노를 하시는 것인가? 이런 건 코미디이다.칼빈의 창세전 예정론을 공격하기 위해서 ‘미리아심’이란 구절을 강조한다면 이건 결국 무작위로 영을 지어 놓으시고 보니 그리되어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결국은 이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러면 ‘미리 아신다’는 것은 다른 의미일 수 있다.

칼빈주의 2024.10.05

구원의 선택의 대상은 전부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은 누구는 선택이 되고 누구는 안되고가 아니고, 인간 모두를 선택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성경에서 “누구든지”와 서로 양립이 된다. 즉 선택의 대상은 개개인으로 하신 것이 아니다. 항상 “너희들”이라는 복수로 쓰신다. 다시 말하면 불특정 다수가 된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 전부를 하셨으나 그것을 받은 자들은 모두가 아니다.  인간의 믿음이 구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만들어 내셨다. 그것을 인간에게 제안하셨다. “나는 인간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선택이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면 안된다. 이 죽음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왕국 전체를 위한 거대한 진리의 기둥이..

칼빈주의 2024.09.07

하나님의 선택의 찬양 ??

칼빈의 예정론이 옳다면 성경은 믿음이 아니라 선택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예정은 인간의 모든 믿음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의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한 작은 믿음"에 있다.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불신위에 있는 것이지 선택을 받지 못한 불쌍한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칼빈주의 2024.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