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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교회론'과 니골라당
구약의 광야와 신약의 교회를 대입 구약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설교 등으로 인용하고 그것이 무엇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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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광야와 신약의 교회를 대입
구약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설교 등으로 인용하고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의미하는지 적용점을 찾아내는 시도는 흔한 일이다. 이런 사례 중에는 마치 속담이나 수식처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익숙한 표현이나 교훈도 많다. 이런 것을 잘 찾아내야 좋은 설교가나 문장가가 되는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예표와 상징이란 중요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것을 크리스천에게 애써 적용하는 노력은 부작용을 일으킬 때가 많다. 가장 먼저 그 말씀 자체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 적용점을 찾는 것이 순서인데, 가장 위험한 태도는 설교 주제 발굴이나 논리 개발 등을 위해 성경의 어떤 사건에 깊이 파고들어 자잘한 것들에까지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태도는 성경을 신화처럼 만들기도 하고, 이솝 우화나 탈무드 수준의 지혜서로 전락시킬 수 있다.
예컨대 노아의 방주를 보고, 1년 동안 갇혀 답답하고 짐승의 냄새로 불쾌했을 방주에 창이 없고 천장에만 창이 있는 것은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만 보라는 뜻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일리가 있는 이야기인데,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방주에는 벽에 창이 있으면 물이 샐 수 있기 때문이고, 세상 사람들과 동물들이 죽어가는 끔찍한 모습을 보지 않도록 설계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난리 속에 떠있어야 하는 방주이고 공기는 필요하니 당연히 윗부분에 창을 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애굽)를 탈출한 사건을 구원의 예표로 보고 가나안을 천국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렇게 본다고 해서 누가 잡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도출된 논리가 확장되어 해괴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
우선 이스라엘을 교회나 신약 성도로 대입시키는 태도 자체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집트 탈출을 구원으로 보면, 구원받고도 불 뱀에 물려 죽듯이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 또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세 등 많은 구원 받은 사람들이 다 천국(가나안)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식의 위험천만한 교리가 나온다. 또한 가나안을 구원으로 볼 때도 모세가 광야에서 죽었으니 구원을 못 받았느냐는 식의 의문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런 사건들은 참고로 보고, 우리의 배움을 위해 기록된 것으로 봐야지, 무조건 이건 이런 걸 상징하고, 저건 저런 걸 예표한다고 규정지어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사고가 위험하다는 것을 감안하고 본다 해도 이집트 탈출보다는 가나안 입성을 구원으로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패역한 사람들의 땅이며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린 자녀들은 조건 없이 그곳에 들어갔다. 가나안이 천국이라면 전쟁이 있을 수도 없고, 자녀들이 몇 대가 지나면서 하나님을 잊고 자기들 생각대로 살아가는 비참한 상황이 올 수 없지 않은가.
가나안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고난이 있음을 보여 주는 성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해석에 집착하면 구원을 그리 오랜 광야의 방황과 시험을 통해 얻는다는 것으로도 오해될 소지가 있고, 설상가상으로 모세가 구원을 못 받은 것이 될 수 있으니, 어느 것이든 필요 이상으로 확장시켜서 논리를 펴는 것은 위험하며 모든 것이 다 풀려야 한다는 억지주장이나 해괴한 영적 해석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으니 지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급이 다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광야 교회'라는 말로 광야 생활이 교회의 천국 여정이라고 굳이 말한다. 그러다 보니 불순종하다 낙오하는 이들이 생기고, 죽는 사람도 생기고, 끝까지 충성하는 소수만이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믿는 자들 중에도 일부만 천국에 입성한다는 식의 논리를 펼치게 된다.
이 과정은 목회자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전할 때도 이용된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했다는 것인데, 교회의 리더들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결정한 경우에, 우상을 만들거나 리더를 원망하는 등 화가 미칠 만한 안 좋은 일들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리더인 모세는 왜 가나안에 못 갔는가???
이른바 '광야 교회론'을 들며 광야에서는 리더에게 순종해야 하고, 교회는 회중이 다수결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주신 리더들이 이끌어가는 것이니 나서지 말라고 한다. 물론 교회를 다수결로 이끌 수는 없다는 데는 동의한다. 말씀을 맡은 리더들은 존중돼야 하고,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에서 그들의 역할에 대해 존중하고 권위에 대해서도 인정해야 한다. 말씀을 다루는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역할을 잘 못하고 있으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성도는 무조건 불순종하는 자로 분류하곤 한다. 정죄하고 판단하기 위해 이 부분을 들이대면 매우 곤란하다.
신약 시대를 살면서도 구약을 들어 그런 주장을 펴는 목회자들은, 신약에 와서는 제사장 제도가 없어졌으므로 목회자와 성도의 체제가 달라지지 않았느냐는 반문에는 이렇게 대답한다.
신약에도 사도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리더의 역할을 감당했고, 집사들은 재정과 봉사 등을 맡아 섬겼기 때문에 목회자와 평신도의 경계는 확연하다는 것이다. 신약 시대 교회도 광야에서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다. 사도나 감독이 아니며 흔히 집사로 불리는 스데반 같은 사람은 설교를 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있었다. 그와 함께 재정과 봉사를 위해서 세워졌다고 주장되는 일곱 집사(행21:8, 개역성경에만 '집사'로 나옴) 중 하나로 불리는 빌립은 아스돗에서 가이사랴까지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으며 많은 기적을 행하였고, 이디오피아(구스) 내시에게 침례도 베풀었다.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응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니라. 그가 명령하여 병거를 멈추게 한 뒤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 속으로 내려가니 빌립이 내시에게 침례를 주니라. (행8:37~38) -개역성경은 37절이 '없음'이다.
요즘 일반 교회에서 집사가 침례(세례)를 베풀었다면 아마도 난리가 나거나 '원천무효'라고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먼저 믿은 사람은 누구라도 침례를 베풀 수가 있다. 그러니 사도들이 리더이며 특정한 권한과 결정권이 있었다는 말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집사들은 봉사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는 틀린 것이다. 또한 요즘 교회들은 모든 성도들을 사도와 제자로 훈련시킨다면서도 권한과 기득권에 있어서는 그들을 언제나 평신도로 분류하고 있어 이중잣대를 숨기고 있다.
교회는 다수결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큰일은 사무총회 등을 통해 의결 정족수를 채워서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어 결정하기도 하고, 교단의 감독을 받는 개교회도 있다. 그러면서도 리더들의 결정권을 강조하는 교역자들은 단지 불만을 표출하지 말고 입을 다물라는 이야기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교역자들과 당회 등 교회의 소위 기득권 층이라 할 수 있는 운영위 선에서 벌어진 미숙한 일처리나 실수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분위기를 생각하면 상당히 불공평한 관계를 지속하려는 의도이다.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기
요즘 평신도에 속하는 '장로'의 개념은 구약적인 것이며 칼빈이 도입한 것이다. 신약 교회의 장로는 감독과 같은 직분으로, 가르치는 목사의 개념이다. 사도인 베드로가 장로로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베드로)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벧전5:1)
스스로를 장로라고 지칭한 베드로는 계속해서 다른 장로들, 즉 교회의 리더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벧전5:3)
목사의 입장에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번역된 듯한 개역개정은 이 구절의 본질을 흐려놓고 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5:3, 개역개정)
맡은 자들이라니, 뭘 맡은 자들인가? 주장하는 자세라니 뭘 주장한다는 것인가? 맡은 자가 아니라 상속 백성(God's heritage)이며,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군림하는(being lords)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말씀도 이어진다.
젊은 사람들아, 너희도 이와 같이 장로에게 복종하고 참으로 다 서로에게 복종하며 겸손으로 옷 입으라.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5:5)
서로 겸손히 섬겨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말씀을 통해 장로는 원래 일반 신도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개신교단들이 성경대로 직분을 나누지 않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언젠가 부흥집회에 온 어느 큰 교회 목사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교역자들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어? 뭔가 크게 착각하는 사람들이여... 최고로 높은 장로님이고 제일 어린 교육전도사라도 성도가 교역자한테 막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여... 아무리 어려도 전도사부터는 로얄빼밀리여, 로얄빼밀리~. 교역자들은 똑바로 해서 평신도들 잘 가르치란 말이오... 괜히 평신도들 '병신도' 만들지 말고~."
엄청 큰 교회 목사라고 하는데, 설교를 약장수한테 배운 모양이었다. 그에 의하면 누구든지 로열패밀리가 되려면 신학교에 입학하면 된다. 로열패밀리 되기가 쉬워서 그런지, 하나님의 상속 백성들조차 띄엄띄엄 보는 저렴한 태도에 분노를 넘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
니골라당의 행위와 교리
목회자라면 제발 어디서 들은 대로 설교하지 말고 성경을 읽고 공부해서 전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성도들의 잘못을 성경을 들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강해하는 척하면서 전함으로써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입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노골적인 억압보다 더 금기시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니골라당의 행위, 또는 교리이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단 니골라당(Nicolaitans)은 그리스어의 어근 '니카오'와 '라오스'의 합성어로 '일반 백성(평신도)을 정복하다'라는 뜻인데, 구약 시대의 제사장처럼 성도들을 통치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신약 시대가 시작된 직후부터 등장했다고 하는데, 이후 초기 교부들과 로마 가톨릭에 의해 정착되고 체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그들은 성직자를 제사장(priest)이라 부르며 교황, 추기경, 신부 등의 서열에 따른 계급주의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으며 이런 잔재가 개신교에 남아 있다.
(에베소 교회에게)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 (계2:6)
(버가모 교회에게)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거니와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 (계2:15)
그런데 개역성경은 2장 15절 말씀에서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를 삭제해 버렸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2:15, 개역개정)
한국 교회 목사들은 자기들이 니골라당의 행위를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일단 그 뜻도 잘 모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Nicolaitans를 음역한 '니골라당'을 니골라 '당', 즉 하나의 분파로 쓰고 니콜라스라는 사람의 가르침을 추종했던 무리라고 가르치기도 하며, 그들의 특징은 앞 절인 계시록 2장 14절에 나오는 발람의 교리와 비슷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의 니콜라스(니골라)는 사도들이 세운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엉뚱한 내용들은 인터넷 지식사전 등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곳에서조차 "교부 이레니우스는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집사 니골라가 이 당을 창설했다고 주장했는데 확실하지 않다."고 나와 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쁘게 여기고 믿음과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유대교 개종자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행6:5)
바로 여기 나오는 니골라를 추종한 무리라는 것인데, 이 사람이 이상한 교리를 전했거나 이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다. 오히려 니골라는 안디옥에서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로, 열렬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택된 7인 중 하나인 사람이다. 흔히 이들을 '일곱 집사(행21:8, 개역개정)'라고 표현하지만, 집사(deacon)라는 단어는 빌립보서 1장과 디모데전서 3장에만 나온다.
성경만 들이대면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그런가 보다' 하면서, 리더를 비판한 적이 없는지 자신들을 돌아보고 두려워하는 신자들이 많다. 그런 모습을 보는 목회자들은 자기가 크게 평신도들을 일깨웠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함량미달의 설교에도 '아멘'으로 화답하는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이 판단 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은혜(?)만 받고 있다.
이미 왕가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신분이 되었음을 망각하고, 아직도 벌벌 떨면서 종노릇하는 '평신도'가 되어 '광야교회'에서 불순종하다 죽을까봐 '로열패밀리'의 은총에 기대어 사는가?
현대판 니골라당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여전히 누군가 자기 영의 대리자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이사 갈 날짜까지 점쟁이와 무당에게 받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성직자'가 대신 구원을 이루어 줄 것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무능한 '평' 신도로 분류되고자 하는 이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2:15)
물론 성도가 목회자 앞에 월권행위를 하거나 교회를 쥐고 흔들며 모든 결정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균형 잡힌 바른 판단을 통해 건강한 교회와 목회자를 세워나가는 것이 성도의 중대한 의무가 아닐까 한다.
출처: keepbible
글쓴이 : 김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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