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마태복음

마태복음 27:1-10 매튜 헨리의 주석

별을 보며 2022. 11. 3. 10:16

유다가 뉘우침 (마태복음 27:1-10)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히셔서 사형선고를 받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들의 이빨만을 드러내 보였을 따름이다. 이 일이 있기 약 2년 전에 로마인들은 주요한 형벌에 대한 권한을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그들은 누구도 사형을 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아침 일찍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하여 또 다른 회의가 소집되고 있다. 그들이 두 세 시간을 자면서 곰곰히 생각하고 난 다음에 그 아침 회의에서 어떤 일이 행해졌는가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가 빌라도에게 넘겨진 것은 빌라도로 하여금 그들이 내린 사형 언도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유다 나라는 이 일이 있기 약 100년 전에 품페이에 의해 정복이 되었으므로 그 이래로 로마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또한 최근에는 수리아 지방의 한 영주가 되어 수리아의 총독의 지배를 받았으며, 수리아의 총독 아래에는 주로 "세금" 받는 일을 관장하였던 몇몇 "집행관"들이 있었는데, 종종 특별히 빌라도와 같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전권을 가진 자도 있었다. 이것은 야곱의 예언대로 "홀이 유다에서 떠나고" 지금은 "실로가 와야만 하는" 분명한 증거였다(창 49:10). 그 당시의 로마인 저술가는 빌라도가 거칠고 교만하며 사악하고 무자비하고 또한 큰 탐욕을 가지고 있고 억압적인 사람이라고 특징을 지우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에 대하여 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통치에 피곤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빌라도를 그리스도를 거스리는 그들의 사악함에 대한 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1.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였다." 그는 맨 처음 붙잡히셨을 때 결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공회 앞에 섰을 때 이러한 속박들을 풀어 주었었으나 지금 다시 그를 결박하였던 것이다. 그가 유죄임이 선고되었으므로 그들은 흔히 죄수들에게 하듯이 그의 손을 뒤로 묶었다. 그는 이미 사람에게 대한 사랑의 줄로 묶이었으며 또한 그 자신의 임무의 줄에 묶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곧 삼손이 했던 것처럼 이러한 속박들을 즉시 끊어버리셨을 것이다. 우리는 "불법의 차꼬"에 채워졌으며, 우리의 죄의 줄에 묶이었다(잠 5: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범죄의 멍에"를 주 예수님의 목에다 매셨다(애 1:14).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채찍으로 말미암아 나음"을 입은 것 같이 그의 속박으로 말미암아 해방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2.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양과 같이" 그를 끌고 갔다. 이와 같이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사 53:7, 8). 가야바의 집에서 빌라도가 있는 곳까지는 거의 일마일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그를 세상의 조롱거리로 삼기 위하여 아침에 사람들이 법석거리기 시작할 때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요소 요소를 거치면서 그를 끌고 갔다.

3. 그들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그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은 다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죄 아래 놓여져 있음이 판명되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세주가 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같이 심판을 하시려고 오셨으며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은 그의 사망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은 국가의 통치자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불의한 법령들을 수행하도록 하며 또한 "불의한 말을 기록하도록 하였다"(사 10:1). 이와 같이 지상의 왕들은 교황권에 의하여 그들이 이단자로 낙인찍은 자들을 옳건 그르던간에 자신들의 편견대로 전쟁의 칼이나 공의의 칼로 그들을 제거하는 수고를 하도록 책임이 부과되었고 판결을 받았다.

Ⅱ. 그들이 그리스도를 파는 대가로 지불하였던 돈은 그에 의하여 도로 그들에게로 넘겨졌으며, 또한 유다는 실망한 나머지 목매어 죽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리스도를 박해할 때에 그의 제자가 그를 자기들에게 팔도록 후원하였다. 그러나 지금 박해하는 도중에 그 끄나플(유다)은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었고, 유다 역시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나타내는 "증인"이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공의의 기념물이 되었다. 이것은,

1. 그리스도께서 박해를 받고 있는 도중에 그를 영광스럽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또한 유다에게 들어갔던 사탄을 정복한 것을 나타내는 조짐이 되었다.

2. 그의 박해자들에게 경고를 주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변명할 수 없도록 하였다. 만일 그들의 마음이 이러한 악을 행하는 데 완전히 굳어있지만 않았다면,(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다가 말하고 행한 것을 보고 자신들의 박해를 마땅히 멈추었어야만 할 것이다.

(2) 여기에서 유다가 어떻게 "뉘우쳤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뉘우치고 믿고 용서받은 베드로와 같지 않았다. 아니 그는 뉘우치고 실망하고 멸망을 받았다.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무엇이 그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께서 정죄됨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한 그가 재판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변명을 하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명예를 얻고, 유대인들은 수치를 당하며 그는 돈을 벌게 되고, 그밖에 아무런 해악도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이러한 기대를 가질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종종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아마도 유다는 그것을 기대하였으며, 또한 그 일이 자기가 공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거센 물줄기가 그리스도에게 휘몰아쳐서 그를 휩쓸려 가버리는 것을 보았을 때 두려움 가운데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법보다는 행동 결과에 의해 행동들을 측정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측정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길이다. 만일 우리가 쉽사리 자신들을 멈출 수가 없다면, 우리와 함께 죄악 된 길로 출발하였던 다른 사람들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는 "스스로 뉘우쳤다." 즉, 그는 자신이 행했던 일을 회상할 때에 스스로 슬픔과 고뇌와 분노에 차 있었다. 그가 주님을 배반하도록 유혹을 받았을 때, "포도주가 붉을 때 컵에 그러한 색깔을 띠게 하는 것과 같이" 은 삼십은 매우 훌륭하고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일이 행해지고 그 돈이 지불되었을 때 그 은(銀)은 쓰레기가 되었으며, 그것은 "뱀과 같이 그를 물었고 독사처럼 쏘았던 것이다." 이제 그의 양심은 그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내가 무엇을 했던고 ! 이러한 사소한 일 때문에 나의 주님과 그 안에 있는 나의 모든 위로와 행복을 팔아버리다니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나쁜 사람인가 ! 그에게 행해진 이러한 악행과 모욕을 내가 받아야만 한다(나에게 책임이 있다). 그가 결박을 당하고 정죄를 받고 침뱉음을 당하고 희롱을 당하신 것은 나 때문이다. 내가 그 악한 계약을 맺었을 때 나는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나는 어리석고 무지하며, 짐승과 같은 자였구나."

이제 그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돈주머니와 그가 좋아하던 돈과 그가 상대한 제사장들과 그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도 비열하게 내버렸던 자신에게 대한 주님의 선하심과 그가 걷어차 버렸던 자비의 그릇들, 그가 업신여겼던 명확한 경고 등을 생각하면 그의 죄책감은 더욱 커져만 갔으며, 더욱 마음을 찔렀던 것이다. 이제 유다는 그의 주님의 말씀들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죄는 즉시 그 맛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것이 "맛있는 음식물"과 같이 "혀 밑에 감춘다" 할지라도 뱃속에서는 "독사의 쓸개"가 될 것이다(욥 20:12-14). 이것은 요한 계시록(계 10:9)에 있는 것과 같다.



[2] 그의 뉘우침의 표식은 어떤 것이었는가?

첫째, 그는 반환을 하였다. 유다는 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에게 도로 가져다주었다." 지금 그 돈은 그의 양심에서 불태워졌으며, 그가 그것을 좋아했을 때처럼 그것에 병이 들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악하게 얻어진 것은 그것을 얻은 자에게 결코 좋은 것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렘 13:10; 욥 20:15).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팔기 전에 뉘우치고 그 돈을 도로 가져왔더라면, 그는 즐겁게 그 일을 행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길에서 사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도 늦었으며, 그는 두려움이 없이 그 일을 할 수는 결코 없다. 유다는 그것을 도로 가져왔다(약 5:3).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불의하게 얻어진 것은 보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얻어진 범죄를 계속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자백하는 것이 회개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이 그것을 취하였던 자에게로 도로 가져다 준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계약한 것을 뉘우친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데 조력을 하거나 권고를 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케 하실 때 그것이 죄에 동참했던 자들에게 회개케 하는 수단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알도록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그는 고백을 하였다(4절).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1.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그는 그의 피가 "무죄하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어떤 죄악된 행동을 범하였다면, 그의 제자인 유다는 분명히 그것을 알았을 것이며, 배반자인 그가 분명히 그것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정죄한 자들에게 그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2. "자신의 수치"를 무릅쓰고 유다는 자신이 이 무죄한 피를 팔음으로써 범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있으며, "너희가 나를 그렇게 하라고 시킴으로써 범죄하였도다."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 모든 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범죄하였도다." 이와 같이 유다는 회개에로 많이 접근하여 갔지만 그것이 "구원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는 고백을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그에게로 가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얻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고백을 하였지만 이러한 악행의 뿌리가 되었던 돈에 대한 사악한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배신하고도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유다만도 못한 자들이다.

(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유다의 회개를 듣고 어떻게 대하였는가?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들을 자신의 참회자로 삼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그에게 "면제"르 해 준 내용인 것이다. 이는 그들이 거룩하신 산 하나님의 제사장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귀의 제사장들과 흡사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는 일이라 할 수 있다.

[1] 그리스도를 배신한 것에 대하여 그들은 얼마나 경솔하게 말을 하였는가? 유다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무죄한 피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하였다. 그들이 이 피에 굶주렸고 유다로 하여금 그것을 팔도록 하였고 지금 그 피를 불의하게 흘리도록 정죄를 하고서도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인가?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를 난폭하게 핍박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거나 또는 이 의로운 사람에게 이러한 악행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될 수 없는가? 이와 같이 어리석음은 악행을 하고서도 해악이 행해지거나 위험이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범죄 사실을 비웃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경시(소홀)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케 만든다. 그가 이러한 일들을 당한 것이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

[2] 유다의 범죄에 대해 그들은 얼마나 경솔하게 말하고 있는가? 유다는 "내가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우리들에게 말한 네 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 특히 우리가 어느 정도 접근해 있거나 또는 관여하고 있는 그러한 죄들이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시고 영혼들이 상처를 입고 사탄이 만족하게 되고 그의 이해 관계가 충족되고 우리가 그것을 거들고 선동한 사실이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단 말인가? 만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이세벨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나봇을 죽였다면 그것은 아합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그렇다. 그는 "재물을 탈취하기" 위하여 "그를 죽였다."(왕상 21:19). 죄를 범한 것은 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변경시킬 수는 없다. 만일 그 일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들은 유다에게 그것을 "책임지라"고 했을 것이다

첫째, 왜냐하면 그가 그들에게 주님을 팔아 넘겼기 때문이다. 그의 죄는 실로 "큰 죄"(요 19:11)였다. 그렇다고 그들의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죄가 더욱 커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죄가 경감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속임수로 가득차 있다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로 행해지며, 비교에 의해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둘째, 왜냐하면 유다는 그가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무죄하다고 하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너나 그것을 알도록 하라. 우리는 그가 유죄하다는 것을 선고하였으며, 그러므로 그를 이와 같이 박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악한 행위들은 사악한 원칙들, 즉 죄는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죄이다라는 원칙들에 의해 지지가 된다. 즉 아무리 선한 사람도 악인으로 생각한다면 그를 박해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을 조롱하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을 속이고 파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그들은 유다가 당하고 있는 죄책과 두려움과 후회에 대해 너무도 무관심하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죄를 짓게 하는 데는 그를 기꺼이 이용하려고 하였으며, 그 때에는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유다가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말했을 때 그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자신이 놀라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그들은 그에게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외면하고 말았다. 왜 그는 그의 우울한 환상을 가지고 그들을 괴롭게 하려고 찾아 왔는가? 그들은 유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보다 더 시급히 해야할 일들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들은 꽁무니를 빼려고 했는가?

첫째, 아마도 그들은 유다가 회심한 것이 하나의 불티가 되어 그들에게로 다가와 그 자신의 양심에 불을 붙이게 될까봐 두려워하였으며, 또한 그의 신음소리가 그들의 죄책감에 대한 하나의 경종이 될까봐 두려워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완고한 죄인들은 죄를 깨닫게 될까봐 조심을 하며 또한 완고하게 회개치 않으려는 자들은 회개한 자를 멸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어쨌든 그들은 유다를 후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유다를 덫에 걸리게 했을 때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며, 오히려 비소를 하였다. 반역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반역자를 미워한다는 것은 흔히 있을 일이다.



(3) 이로 말미암아 유다는 완전히 실망하게 되었다. 만일 대제사장들이 박해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더라면 그것은 어느 정도 그를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그는 완전히 실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5절).

[1] "그는 은을 성소에 던져 넣었다." 대제사장들은 그 돈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렇게 함으로서 범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들이 지게 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책임을 유다가 지기를 원하였다. 유다는 그것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 뜨거운 서이어서 도저히 그것을 가질 수가 없었다. 따라서 유다는 제사장들이 그것을 받듣지, 안받든지 간에 그들의 손에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 성전에 던져 놓았다. 범죄가 덧붙여지거나 그렇게 생각이 될 때 그 돈은 얼마나 큰 마약이 되고 말았는가 !

[2] "그는 물러가사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첫째, 그는 "물러갔다"(avgecow,hse). 그는 귀신에 의해 광야로 이끌려 갔던 귀신들린 사람(눅 8:29)처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다. 실망하여 홀로 있는 자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다. 만일 유다가 그리스도나 또는 제자들 중의 어떤 사람에게로 갔더라면 아마도 그는 비록 그 처지가 좋지 못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구출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에게서 실망을 느꼈을 때 완전히 자신을 포기하고 말았다. 유다를 죄 가운데로 빠지게 하는 일에 있어서 제사장들을 조력했던 바로 그 마귀는 역시 그를 도와 절망 가운데로 빠지게 하였다.

둘째, 그는 그 자신의 집행관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는 슬퍼서 "질식하였다"고 하몬드 박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휘트비 박사는 우리의 번역이 옳다고 말한다. 유다는 죄를 "알고 느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불법으로 파리해졌다." 아마도 그의 죄는 원래부터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죽인 사람들 중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가인처럼 자신의 불법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보다는 차라리 마귀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유다는 주님의 피를 판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실망"하는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다. 이제 전능자의 두려움은 유다를 대적하기 위하여 정렬을 하였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들은 그에 관하여 미리 예언된 것처럼(시 109:18, 19).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지옥"을 피하기 위하여 피신을 하려고 했으며 완전히 이 두려움과 실망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 곳을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다 쓰려고 했다. 그는 불꽃을 피하기 위하여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안락을 위해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것은 실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1. 사단이 들어간 사람, 특히 돈을 전적으로 사랑한 사람의 비참한 말로를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게 된 동기이다(딤전 6:9, 10). "귀신이 들어간" 돼지나 또는 배신자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기억하도록 하자. 그리고 "귀신(마귀)에게 거처할 곳을 주지 말도록 하자."

2. 하나님의 진노가 경건치 못한 자와 불의한 자에게 하늘로 쫓아 나타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롬 1:18).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죄인이 회개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의 승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유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죄인들이 타락할 때 하나님의 엄격함과 또한 그리스도의 능력과 공의가 승리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사탄이 들어간 유다가 이와 같이 "목을 매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의 "못쓰게 해 버리신" 정사와 권세를 나타내 보이셨다(골 2:15).

3. 실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 실망은 종종 사람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든다. 죄에 대한 "근심"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하지 않는다면 가장 처참한 "사망을 이루게 된다"(고후 7:10). "누가 상처받은 심령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가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할 수 있는 대로 죄에 대하여 나쁘게 생각하도록 하자. 우리 스스로는 도움을 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신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양심을 편안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제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최악의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살하는 것은 비록 이방의 도덕주의자들 중의 어떤 사람에 의해 기술되었지만 병이 아무리 악화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히 그 병보다 더욱 나쁜 치료약이다. 우울증이 시작되는가를 살피도록 하자. 그리고 주여,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하자.

(4) 유다가 도로 가져 온 돈을 처분함(6-10절). 그 돋은 "토기장이의 밭"이라고 불리우는 밭을 사는데 사용되었다. 그렇게 불리운 것은 어떤 토기장이가 그것을 소유했던지, 아니면 그 근처에 살았던지, 또는 토기 그릇이 그곳에 버려졌기 때문이다. 이 밭은 나그네, 즉 유대교의 개종자를 위한 매장지였었는데,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었지만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죽은 자들이었다.

[1] 그들이 "나그네의 묘지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그들의 인간성의 한 실례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그것은(사도 바울이 행 24:15 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들이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죽은 몸(시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이성적인 영혼의 거주지가 될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살아 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 그들이 이방의 나그네들을 자신들의 매장지에 묻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별도의 매장지에 묻으려 한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 결여된 한 실례이다. 나그네들은 살았을 때나 죽었을 때나 먼 거리감을 두고 떨어져 있어야 했으며, 또한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5)라는 원칙이 무덤에까지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헷 자손들은 비록 아브라함이 그들 가운데 우거하는 나그네였지만 그에 대하여 호의를 가졌으며, 그들의 최상의 묘지를 그에게 드렸다(창 23:6). 그러나 "주님과 연합한 나그네의 후손들"은 비록 별도로 묻혔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과 더불어 함께 일어날 것이다.

이 토기장의 밭을 사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날에 있지는 않았다(그들은 그 때에 오직 그리스도를 넘어뜨리는 것 이외에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오래지 않아 그 밭을 사는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승천한 후 바로 즉시 그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첫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위선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사악하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1. 그들은 그들이 배신자를 고용할 때 사용하였던 돈을 성전고 또는 "고르반"에 넣어 두기를 주저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성전고에서부터 그 돈을 꺼내었으며, 또한 그들은 "고르반"에 대해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었으며 또한 나라의 모든 재산을 그리로 끌어 모으려고 애를 썼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피의 대가였던 그 돈을 다시 성전고에 넣어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배신자의 임금이 창녀의 임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또한 행악자의 가격(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이것을 적용하였다)은 개의 가격과 맞먹는 것이며, 이상의 것들은 어느 것이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올 수"(신 23:18) 없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성전에 대해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을 붙여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큰 신망을 얻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었다.

2.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그네를 위해 묘지를 마련해 주는 공적인 선행을 베품으로써 자신들의 한 일에 속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무지의 때에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고 수도원에 기부금을 희사하는 것이 부도덕성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둘째, "나그네"와 이방의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도되었던 호의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죽은 후에 그들을 위한 휴식처가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고대인들이 이 뜻을 이 구절에 적용하고 있다. "무덤"은 토기장이의 밭이었는데, 여기에는 시체들이 보잘 것 없는 깨진 그릇처럼 내던져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써 자신을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고백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것을 "매입하셨다." 그는(매입한 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 소유권을 변경하셨으며, 따라서 그 시체나 묘지나 휴식처는 우리의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묘지를 "하나님의 밭"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한 알의 밀알"처럼 "심으시기" 때문이다(요 12:24)(호 2:23; 사 26:19 참조).

셋째, 그리스도의 피를 사고 판 자들의 파렴치한 행동을 영구히 보존시키기 위함이다. 이 밭은 흔히 "아겔다마," 즉 "피밭"이라고 불리웠다. 이렇게 불리운 것은 자신들의 죄를 다시 기억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 묘지에다 매장하기를 원하였던 대제사장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대제사장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지만 유다가 무죄한 피를 팔았던 사실을 인정하였던 사실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밭에 대한 이 이름을 in perpetuam rei memoriam ─ 즉 영구적인 기념으로 고정시켰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신적인 섭리는 비록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려고 할지라도 "영구적인 비난을 받는" 위인들의 사악한 행위에 대해 여러 모양으로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첨가한다는 사실이다.

넷째,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도다." 이 인용된 말씀은 스가랴의 예언(슥 11:12)에서 발견된다. 어찌하여 이 말씀이 여기에서 예레미야에 의해 말해진 것으로 인용된 것인지 이것은 하나의 큰 난문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신임도는 그것에 의존되지는 않는다. 비록 그 저자의 상황에 따라 약간의 인간적인 것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그 자체가 완전히 신적인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대 수리아역에는 누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아니하고 단지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라고 읽고 있는데, 그 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가 어떤 서기관에 의해 첨가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선지서들이 전체적으로 한 권의 책으로 모아졌으며 그 중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맨 처음에 있었으므로 "필사자"(currente calamo)가 그의 이름으로 그 모든 책의 구절들을 인용하였다는 것은 수긍이 갈 만한 견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종종 "예레미야의 영혼이 스가랴에게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한 선지자였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것은 "예레미야가 말했고" 스가랴가 이를 기록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는 예레미야가 스가랴서 9-10장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지서에 있는 이 구절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 큰 멸시를 했던 것을 나타내는데, 오히려 보잘 것 없이 보였던 것이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 여기에서는 실제적으로 적용이 되었다. 돈의 총계가 똑 같다. 즉 "은 삼십"이다. 그들은 그에 대해 매긴 값대로 "그를 파는 대가로" 이것을 달아 주었다. 즉 적절한 가격이었다. 또한 이것은 "여호와의 집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져졌다." 이것은 여기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성경의 언어와 문자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다면 섭리의 사건들도 더 잘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달리는 자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한 것들도 때로 섭리의 뜻에 대하여 분명하게 기록되기 때문이다. 다윗이 비유적으로 말한 것(시 92:7)을 요나는 이를 문자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즉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욘 2:3).

그에 대한 정가된 금액을 그를 위해서가 아닌 "토기장이의 밭을"사는 데 준 것은,

1. 그리스도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낮은 가격을 나타낸다. 그 가격은 그를 위하여 주어지지는 않았다. 아니 그것이 그에게 주어졌을 때 무한히 그의 가격을 낮춘 것처럼 불명예스럽게 도로 그에게로 반환되었다. 주님은 "오빌의 금으로도 비교될" 수 없으며, "돈으로 산" 이러한 말할 수 없는 선물로도 비교될 수 없다.

2. 그에게 매겨진 낮은 가격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이상하게도 주님을 과소평가 하였으며, 그에 대한 가격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토기장이의 밭을 겨우 살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렇게 값어치 없이 팔릴 정도로 낮은 신분의 사람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비난이기도 하였다. 스가랴에 있는 것처럼, "그것은 토기장이에게 던져라." 즉 값있는 것들을 취급하는 상인이 아닌, 보잘 것 없는 사소한 행상인에게 던지라.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그를 값어치 없이 여겼다.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그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더 잘 알고 있었던 그 자신의 백성들이었으며, 또한 그는 그들에게로 맨 처음 보냄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하여 그는 높이 평가하여 매우 소중하게 사들인 자들이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왕의 속량물과 부요한 나라들("그는 그들을 존귀하게 여겼다." 사 43:3, 4), 즉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대하여 노예의 속량물(출 21:32 을 보라)을 주었고 토기장이의 밭에 해당하는 가격 정도로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사신 그 피는 발아래 짓밟혀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바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이 이 사건에 상징된 예언적인 환상은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와 미리 아심에 의한"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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