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11:1
유대 민족의 파멸 (스가랴 11:1-3)
성경에서는 대개 침울하고 비유적인 표현으로 먼 훗날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들이 선포된다. 여기서는 예루살렘과 성전과 유대 나라가 모두 파괴되리라는 예언이 나왔다. 다음과 같이 선포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때가 되었을 때 매우 알기 쉽고 명백하게 예언하신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본다.
1. 그러한 멸망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본다(1절). "레바논아 네 문을 열라! 그렇지만, 너희의 왕이 들어오게 하려고 문을 열지 말라 - 그가 바로 자기 백성에게 왔으나 그들이 그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희의 멸망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숲의 문들과 그리고 통하는 모든 길을 열어 놓아라. 그리고 그 영광을 불이 삼켜버리도록 하라."
혹자들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지어진 성전과 레바논의 눈처럼 흰 성전의 돌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그 성전은 로마인들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분노한 군사들이 그 문을 강제로 열어젖혔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확증하려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두 번째로 지은 성전이 무너지기 40년 전에 이미 성전의 문은 스스로 열려졌다는 것이었다. 이 일에 관해서 유대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불세출의 랍비였던 조하난(Johana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레바논아 네 문을 들어,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는 스가랴의 예언에 따라서, 성전이 무너질 날이 이제 가까웠음을 나는 알 수 있다" 고 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이나 아니면 북쪽의 관문이 레바논이 되는 가나안의 모든 땅의 멸망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모든 것이 침략자들에게 개방될 것이며, 백향목과 더불어 용감하고 지위가 높던 자들도 불에 탈 것이니, 이것이 비천한 자들에게도 경고가 될 수밖에 없게 되리라(2절). "백향목이 넘어지게 되면(즉 "모든 용사들이 결딴이 나고" 멸망한다고 하면), 전나무는 곡을 하게 되리라." 당당히 서 있던 백향목이 넘어졌는데, 어떻게 가냘픈 전나무가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는가? 백향목이 불살라지게 되면, 그때는 전나무도 곡할 시기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전나무처럼 불에 타기 쉬운 나무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극히 상하기 쉬운 "바산의 나무는 곡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포도의 수풀" (곧 각별하게 가꾸어지던 "무성한 포도원")이 무너졌고, 또한 (혹자의 해석처럼) 레바논에 있던 것과 같은 "방위된 수풀" 도 무너졌기 때문이다. 현명하며 선한 자들이 죄에 빠지고, 부자와 위인들도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은 여러 면에서 불안정한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는 큰 경보가 된다.
2. 여기에 파멸로 인한 애곡이 있다(3절). "곡하는 소리가 있다" 고 했다. 몰락한 자들, 그리고 자기들도 몰락하게 될 것을 아는 자들은 비탄과 치욕으로 인해서 슬픔에서 울부짖는다. 그러나 고관들이 더욱 당황하여 놀라게 되었다. 승리의 잔칫날에 떠들썩하게 즐기던 사람들이 공포의 날이 되면 떨며 울부짖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슬픔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고관들은 직능상 목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책임진 하나님의 남은 무리를 보호해야 했다. 그것은 또한 방백들과 제사장들 모두의 의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린 사자들" 과도 같이, 고함을 질러 그 무리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자기의 밥으로 삼아 버렸다. 목자와도 같았던 그들이 어린(젊은) 사자로 돌변하게 된 것은 그들에게는 대단히 비참한 일이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목자들은 "자기들의 자랑이 황무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목동의 자랑이었던 푸른 초장과 그것을 뒤덮었던 수많은 양떼들이 결딴이 났다. "젊은 사자들" 은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게 되었기 때문에"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요단의 자랑은 둑 위에 있는 숲과도 같았고, 사자들은 그 안에서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강물이 넘쳐나게 되어, 더 이상 배기지 못하게 되자 그 사자들은 그 속에서 기어나와서(렘 49:19 에서처럼) 울부짖었던 것이다. 권력을 잡은 자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목자가 아니라 사자처럼 변하게 되면,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자랑)을 낮추시고 그 권력을 꺾으시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슥 11:4
예고된 심판 (스가랴 11:4-14)
예언자 이사야가 때로 그러했듯이, 여기 이 예언자도 그리스도의 예형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내용은 "심판을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 (요 9:39)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 심판은 어디까지나, 주께서 오셨을 때, 유대 통치자들의 위선과 속된 생활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타락했던 유대 교회와 유대 나라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으나, 그들은 치료받지 않으려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결국 파멸당하도록 버림받게 된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 보기로 하자.
Ⅰ. 유대의 성전은 그 나라의 통치자들의 독재 정치 하에서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다. 자기들 나라 속에서의 종살이는 이방 나라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참하게 되었다. "그들의 소유자들은 그들을 잡아 죽이고, 팔아 넘기었다" (5절-다소다름). 스가랴 시대에, 통치자들과 귀족들이 "고리대금업으로 그 형제들을" 괴롭혔다는 정당한 비난이 있음을 보게 된다. 치리자들, 심지어는 그들의 신하들까지도 백성들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느 5:7, 15). 그리스도가 사셨던 때에도, 백성들의 양심을 지키며,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또한 전통적으로 그들을 이끌던 "대제사장과 장로들" 이 지독한 폭군이 되었고, 저들의 재산을 전수하며 재물을 탐내었고, 백성을 먹이는 대신에 오히려 탈취하였다. 자연신론자였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함으로써 도덕과 윤리를 타락케 하였다(마 15:16). 이리하여 그들은 양의 무리를 잡아죽였으며, 또한 팔아 넘기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성취하고 이익을 찾는 데만 급급하였으므로,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1. 여기서 그들은 스스로를 정당화시킨다. 즉 자기들은 "그들을 잡아죽여도, 죄가 없다" 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할지라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고, 더욱이 주인 목자장에게 대해서 그러한 일로 문책을 받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계발을 위하여 구상되어진 저들의 권력을 마치 파괴를 위하여 있는 것과도 같이 생각했다.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은 모세의 율법이 준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며, 거기서 면제받았다는 듯이 행했고, 마음 내키는 대로 그 율법을 깨뜨려 버리기도 하였다.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시키는 자들은 그 마음이 지독하게 무디어진 자들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죄 없다 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이 백성을 수탈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였다. 그들은 "내가 풍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악행 속에서도 번영하고, 재물을 얻고, 지위를 얻은 것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불의한 행실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섭리가 particeps criminis - 즉 그들의 죄악의 공모자가 되었던 때문이라는 듯이 행했다.
우리가 정당하게 얻은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며, 또한 축복으로 "풍요케 하시고,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야 한다. 그렇지만, 불법적인 수단으로 치부한 것을 축복이라고 하며, 더욱이 그러한 성공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려고 한다면,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사실 "도둑질한 것으로 번제를 드리는 자를 책망하시는" 하나님께 죄악된 선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조롱하는 대신, 오히려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 대하여 스스로 수치를 감당하고 보상을 서약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갔어야 했다.
3. 이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들의 호의나 자비로운 관심의 대상이 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경멸하였다. "목자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했다." 그들은 백성들을 비참하게 만들고도,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스도는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것같이(참으로 그들은 불행하였다), 뿔뿔이 흩어져서, 지쳐버렸던 많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그러나, "그들의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했고," 그들에게 추호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교회의 목자가 일단 값진 영혼에 대해 겸손과 자비를 잃어버리거나, 무지한 자와 어리석은 자와 사악한 자, 연약한 자들을 아무런 동정심 없이 바라보게 될 때는 그 교회로서는 아주 불행한 일이다.
Ⅱ. 이렇게 무감각하고 우둔해진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이 임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종교가 부패되었고 거부되었고 파괴되었다. 하나같이 모두 그러했다. 그들은 신앙을 염두에 두지 아니했다.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긴다" (렘 5:31). 그들은 "학대를 당하고 심판을 당한다 하여도" "명령 좇기를 좋아한다" (호 5:11).
또한 그들의 목자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였듯이, 그들도 스로를 한탄하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6절), "내가 다시는 이 땅의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겠노라" 고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멸망을 자초하였으므로 그들의 운명이 그렇게 되도록 버려두리라." 하나님의 자비를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된 자들은 참으로 비참하다. 자기들의 양심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사람의 명령을 말씀인 양 가르치는" 자들(마 15:9; 23:7 에서처럼 "랍비여, 랍비여" 라고 불리어지는 자들)에게 압제를 당했으며 때로는 그들의 시민적 권익까지도 압박당하는 처벌을 당한다. 비굴하게 하나님의 권리를 포기한 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몰수당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유대인들이 그러한 짓을 행하였다. 카톨릭교도도 그러하였다. 그들이 가혹한 대접을 받는다해서, 누가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을까?
하나님은 여기서 그들에게 위기의 징후를 나타내 보이시고 계신다.
1. 하나님께서 장차 그들을 압제자의 손에, "그들 각각을 그 이웃의 손으로" 인도하시사 그들이 서로를 야만스럽게 취급하게 할 것이었다. 예루살렘 도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조세푸스(Josephus)가 유대전사에 기록했듯이, "열혈당" 이라는 사람들이 일반 대적들이 행한 것 이상으로 더욱 난폭하게 동족을 유린했다. 그들 모두가 "그의 왕의 손으로" 넘겨질 것이다. 곧 "우리에게 가이사 이외는 다른 왕이 없다" 고 하면서, 그리스도께 보다도 더욱 충성하였던 로마의 황제에게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주인과 우두머리의 비위를 맞추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로마 사람들을 보내어 "그 땅을 치게" 하셨다.2. 하나님은 그들의 손에서부터 그들을 이끌어내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그 땅 전체를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주께서 그들을 도우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그들을 돕지 못하고, 그들 자신들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Ⅲ. 목자되신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보내면, 그들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시험이 행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을 그들에게 보내셨으나, 그것은 헛되고 말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내 아들은 그들이 존경하리라 말씀하시면서, 자기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셨다" (마 21:37).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그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목자" 라고 불렀다(사 40:11; 겔 34:23). 그 자신도 바리새인들에게 자기가 "양의 목자" 라고 말했고, 목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모두 "절도며 강도" (요 7:1, 2, 11)라고 우리에게 확실하게 밝혀 주셨다. 여기서 이런 것을 알 수 있다.
1. 그가 이 양떼들에게 대해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부탁은 무엇인가?(4절) "그러므로 주, 나의 하나님께서 가라사대(그리스도는 그 아버지를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행동했기 때문이며, 자기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잡힐 양떼를 먹이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는 하나, 도살할 양의 무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대적들은 그들을 하루 종일 죽였으며, "그들을 도살할 양처럼 여기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주인이 그들을 쳐죽였고," 하나님께서도 도살자에게 가도록 내버려 두셨다.
그러나 "힐책과 교훈과 위로로 그들을 먹이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으로 인하여 시들어 빠져 있던 그들에게 좋은 먹이를 주라" 고 하셨다. "그의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한 다른 양들" 은 나중에 끌려들어와야 하지만, "먼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려진 양에게로 갔다" (마 15:24).
2. 그는 이러한 사명을 수락하고, 그것을 추구한다(7절). 말하자면, 주의 뜻이 곧 자기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 나의 하나님! 나는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왔나이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저 도살할 양의 무리를 먹이리라" 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잃어버린 양을 돌보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리를 불쌍히 여겨, 저희를 가르치고, 치유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로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비천한 자를 무시하거나, 비천함을 인하여 그들을 간과해 버리시지 않으셨다. 먹기를 탐하는 목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였다. 단지 자기들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에게만 친근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복음을 "가난한 자들" 에게 가르치셨다(마 11:5). 그가 대부분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말씀을 나누셨다는 사실은 그의 겸손함을 말해 주는 실례이다. 사실상 끝까지 그와 함께 지냈던 제자들도 가난한 자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이다.
3. 그는 그가 떠맡은 임무에 적절한 도구를 갖추었다. "나는 두 개의 막대기를 취했다" 고 했다. 즉 목자의 막대기다. 다른 목자들은 대개 한 개의 지팡이만을 지니나, 그리스도는 두 개를 지니셨는데, 이것은 그가 무리를 돌보시는 데에 2중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하나는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데 필요하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육신을 돌보기 위함인 것이다. 다윗도 하나님의 "막대기" 와 "지팡이" 를 가리켜서(시 23:4), 하나는 바로잡아 주기 위한 막대기요, 또 하나는 도와 주기 위한 지팡이라고 말하였다.
이 지팡이 중 하나는 "아름다움"(은총)이라고 불리웠다. 즉 "거룩한 아름다움" (성결의 미)이라고 불리는 성전을 나타낸다. 그 성전의 문도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것을 "아버지의 집" 이라고 불렀다. 그는 "장사꾼과 돈바꾸는 자들" 을 내어쫓음으로써 그곳에 대한 열성을 입증하셨었다. 또 다른 하나는 "연합"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들의 시정적(市政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요, 민족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인데,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에게 사랑과 평안을 전파하심으로써 그것을 돌보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복음과 그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서 그들의 시정적인 관심사와 거룩한 관심사를 모두 발달시키는 데에 관심을 쏟으셨다.
4. 그 다음으로는 목자장으로서의 그가 어떻게 자기 임무를 실천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는 양떼를 먹였으며" (7절), 백성의 신임을 잃은 세 목자를 쫓아내었다. 그는 "한 달 동안에 내가 세 목자를 끊었다" 고 하였다(8절). 유대 교회 후반기의 불확실하고 부실한 역사를 통하여서,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이루어졌던가를 구체적으로 알 도리는 없다. 그렇지만 대체로 봐서, 그것은 죄지은 목자들을 처벌하는 권력과 정의(사법)의 행동과 또 학대받은 양떼의 원한을 풀어 주는 일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세 계급, 즉 왕, 제사장, 대언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그의 일을 다 하셨을 때 그 불성실성 때문에 폐기되고 만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이 유대인들의 세 종파라고 생각된다. 그 세 종파란 그리스도께서 논쟁을 벌이시지 않고 침묵하셨던(마 22장), 한결같이 곧 "잘리워졌던" 바리세인과 사두개인과 헤롯당들이라는 것이다.
Ⅳ.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그들은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 자신은 그리스도에게 가증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소유물, 곧 그 초장의 양무리에게로 오셨다. 목자와 그의 양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서도 전적인 사랑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악행을 저질렀으므로, "그의 혼이 그들을 혐오하였고," 그들에게 대해서 "고통스러워졌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친절을 베푸셨을지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그가 베푸신 친절을 감당치 못했던 것이다(마 13:58). 그는 그들에게 실망하였으며, 그들에게 대해서 낙담하게 되었고,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잘라버린 목자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때로 비탄한 심정과 눈물어린 눈으로 바라보셨던 그 백성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죄악이 그의 인내심을 능가하였고, 그는 이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혼 마저도 나를 심히 혐오하였다" 고 하셨다(8절). 그래서 "그의 혼이 그들을 싫어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모든 분열은, 애초에 인간 편에서 시작된 것이다.
유대의 건축자들이 그 모퉁이돌을 버린 것처럼, 유대의 목자들도 목자장을 저버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기적들, 백성에 대한 그의 관심에 대해 "분노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백성에게 가증스럽게 되도록 하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하나님과 사악한 무리들은 서로 간에 불화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일보다도 더 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죄스럽고 비참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과 세상과 친근해지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화인 것이다.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는 모든 자들을 혐오하신다.
Ⅴ. 그리스도는 그들을 치유될 수 없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들의 쓸쓸한 집에 버려두셨다(마 23:38). 그들의 평화에 속하는 모든 일들이 이제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심판 날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 그들을 버리는 선고가 내린다(9절). "내가 가로되, 나는 그들을 먹이지 아니하겠다 하였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돌보지 않겠고, 그들은 두 번 다시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또한 너희는 각기 너희의 갈 길을 택하여 갈 것이다. 내가 그들을 먹이지 않음같이 그들은 치유받지 못할 것이다.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두리라(목자는 그들의 빼앗긴 목숨을 구해내기 위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망할 자는 망할 대로 두리라. 이리의 먹이가 될 자들은 그 먹이가 되도록 그대로 둘 것이다. 그들은 유순하고 친절한 본성을 잊고, 피차 살을 먹는 대로 그대로 둘 것이다. 또한 이 양의 무리로 개들처럼 서로 싸우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배척하는 자를 분명히, 그리고 정당히 배척하실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비참하게 될 것이다.
2. 그에 대한 징조들이 있다(10절). 즉, "내가 나의 막대기 곧 아름다움의 막대기를 잘랐다" 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목자가 아니라는 증표로 그렇게 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마치 주인의 청지기가 자기의 흰 막대기를 잘라버림으로 인하여 자기의 임무를 끝장내 버린 것과 마찬가지요, 또한 모세가 율법을 새긴 돌판을 부숨으로써, 잠시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을 멈추게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막대기를 자른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과 행하신" 자기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을 뜻한다. 그 언약이란 곧 "이스라엘" 의 모든 족속과, 또한 개종함으로써 유대 나라에 병합되었던 모든 이방의 백성들과 맺어진 선민의 계약이었다. 유대 교회는 이제 그 모든 자랑거리를 잃게 되었다. 따라서 그 면류관도 더럽혀져서 땅 위에 구르게 되었고, 모든 영예는 먼지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 곳을 떠나셨고, 더 이상 그 곳의 주인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들로부터 빼앗아서, 이방인들에게 주리라" 고 말씀하셨을 때에, "아름다움의 막대기" 를 잘라버리신 것이다(마 21:43). 또 "그것은 그 날에 부러질 것이다." 비록 예루살렘과 유대 나라는 그후 40년 이상 버티었지만, 우리는 "아름다움" 이란 막대기가 그 때 이미 부러졌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11절). 고관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그렇게 되지 말지어다" 고 생각했다(눅 20:16). 그러나 "가련한 양들," 곧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를 시종들었고," 그의 말씀의 권위를 알았고, 이방인의 음성과 목자의 음성을 분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이 주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두려워 떨었으며, 그것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리스도는 가련한 양의 시종을 받으며, 그는 그들을 자기와 함께 하도록 부르셨고, 그의 제자로 또한 증거자로 선택하였음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부한 자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을 적에 가난한 자들은 그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시종들던 자들,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 발 밑에 앉았던 자들은 "그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 7:17).
3. 그들이 배척하는 까닭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들의 혼이 그를 미워하였다" 고 앞에서 말했다. 여기서는 그 한 예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이 은 30개, 곧 30 로마 펜스나 유대 세겔로 30에 그를 팔아 넘기고 말았는데, 그것이 여기서 암시적인 표현으로 예언되었다.
(1) 목자는 자기의 품삯 때문에 그들에게로 왔다(12절). "만일 좋게 여기면, 나에게 댓가를 주라." 그들은 나를 미워하였고, 내게 댓가를 주지 않았으며, 해임시키고 말았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말라. 만일 그들이 기꺼이 나로 그들을 봉사하는 일에 유임시키려 한다면, 나는 그 일을 계속하겠다. 그렇지 않고 아무 댓가없이 나를 돌려보내더라도, 나는 만족한다."
그리스도는 고용된 일꾼이 아니지만, 일꾼들은 자기의 노동의 댓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스도가 팔리시던 날에, 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속히 행하라. 대제사장과의 말을 이행하라. 그들로 하여금 거래를 하든지 말든지 하게 하라" (요 13:27)고 하셨던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자들은 억지로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2) 그들은 그를 "은 30냥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목자로서 그들에게 여러 해 동안 행한 봉사의 댓가는, 그들이 이제 그를 쫓아버리려하는 것이 전부였다. 만일 유다가 이 금액을 정하였다면 그의 이름이 백성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민족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대제사장이 그 값을 자기의 의견에 따라서 결정하였다면(더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백성의 대표자였던 것이다. 즉, "봉헌된 물건" 에 값을 매기는 것은 제사장의 직무의 일부였기 때문이다(레 27:8). 따라서 그들은 주 예수를 값매기려 하였을 것이다.
은 30은 보통 한 사람의 노예에 대한 값이었다(출 21:32). 그리스도를 경시하는 것이나, 그 위대하고 선하신 목자의 사랑을 평가절하하는 자들은 모두 굉장히 타락한 자들임에 틀림없다.
(3) 은은 도무지 그에게는 정당한 값이 되지 못하므로, 경멸하면서 "토기장이에게 던져 주었다." "흙을 사들일 때나 어떤 작은 용무를 위해 그 돈을 쓰게 하라. 그것은 저금할 만큼도 되지 못한다. 토지장이에게는 충분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목자에게 줄 댓가는 되지 못했고, 그를 팔아 넘기기에도 너무 적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그 은 30개를 성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졌다." "그가 그 돈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바로 이 일이 성취되었음을 본다. 그리고 이 예언에 대한 지시가 있다(마 27:9, 10). "은 30냥" 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들에게 팔린 바로 그 값이었다. 그 돈은, 유다가 원치 않았고 제사장들도 돌려받지 않으려 하자, 바로 "토기장이의 밭" 을 사는 값으로 사용되었다. 대제사장의 이러한 갑작스러운 결심도 옛날의 예언과 또 더 오래된 하나님의 지시하심과 선견에 따른 것이었다.
4. 또 다른 막대기를 자름으로써 그들에 대한 배척이 극도에 이른다(14절). 지난 번 막대기는 하나님과 그 백성의 계약 파괴로써 온 교회의 패망을 상징한다. 이것은 그들의 국가의 패망을 가리키는데, 그 패망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형제애가 파괴됨으로써, 또한 옛날 유다와 이스라엘의 관계와 같이 서로간에 적대심과 불화가 다시 일어남으로써 왔다. 이제 그들의 결합이 산산이 부서지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파당 싸움으로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서로가 분노를 발하게 될 것이다. 조각이 난 나라는 "파괴" 될 것이다.
(1) "연합의 막대기" 를 자르고, 그들의 형제관계를 약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그 백성들을 파괴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손쉽게 공통의 외적에게 먹이가 되게 되는 것이다.
(2) 이러한 일은 하나님과 그들과의 계약이 깨어지고, 그들의 신앙이 부패되었을 때에 일어난다. 불의가 커지면, 사랑이 식는다. 만일 그러한 일이 그들과 불화하도록 하나님을 모욕했던 그들 자신 사이에서 불화를 일으킬지라도, 그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막대기가 잘려질 적에는, 연합(유대)의 막대기도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전을 모르는 백성들은 곧 무능한 백성이 될 것이다.
슥 11:15
저주받을 목자 (스가랴 11:15-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목자를 버림으로 인해서 당한 그 백성의 비참한 꼴을 보여 주시면서, 또한 그들이 우매한 목자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함으로 인해 더욱 비참하게 될 것임을 보여 주셨다. 예언자 자신이 이러한 거짓 목자로 분장하고 나타난다(15절).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지니라." 즉, 우매한 목자가 지닌 외투, 바구니, 막대기 따위와 같이 일에 적당치 못한 것을 말한다. 그러한 목자는 그들을 보호하는 대신에 억누르며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16절).
1. 그들은 불신앙적인 목자의 감시 속에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의 서기관과 제사장과 율법사들은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강요할 것이며, 비참하게 만들 것이며, 부과된 전통으로 인하여 그 제사법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보다 훨씬 무거운 멍에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여기서 우매한 목자에 대한 표현은, 마태복음 23장에서 그리스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하신 것과 아주 흡사하다.
2. 그들은 무자비한 왕의 독재 치하에서 살 것이다. 그들이 엄격하게 백성을 통치하며, 애굽이나 바벨론에서처럼 자기의 땅을 백성에 대한 속박의 장소로 삼을 것이다. "방백" 이 힘입어 "정의를 선포한" 하나님을 백성들이 배척하게 될 때, 그들이 "불의한 법을 선포한" 자에게 넘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백성들은 우리 주께서 예언하신 것처럼(마 24:5), 거짓 예언자와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고 미혹당할 것이다. 선동적인 행동으로 로마인들을 노하게 하고 유대 나라의 파괴를 재촉하는 자들이 숱하게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참 메시야를 배척하고 거절하게 되기 전에는, 거짓 메시야가 그들을 기만한 적이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Ⅰ. 그 우매한 목자들이 과연 어떠한 재난을 백성에게 가져다 줄 것인지를 살펴보자(16절). 그들의 형벌로서, 하나님은 목자의 의무를 행치 않는 우매한 목자를 "일으키실" 것이다. 그는 "잘려진 자를 찾지도 아니할 것이요," 길잃은 자들을 좇아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선한 목자가 한 것같이(마 18:12, 13)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서 집으로 데려오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것같이(사 11:11), 돌봄을 필요로 하여도 "어린 사람들" 을 돌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깨어지고," 상처받고, 찢기운 자들을 돌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죽어가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그들은 약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힘없이 서 있는 자들을 "먹이지" 아니할 것이고, 내버려두어 잡혀 먹히도록 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약한 자들을 도울" 일을 하지 아니하고, "연약한 마음을 가진 자" 들을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1. 그들은 호화스럽게 될 것이며, "살찐 자의 고기를 먹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질 것이다." "나의 주인은 늦게 오시리라" 고 하던 "악한 종" 과도 같이, 그들은 "술 취한 자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자기들의 배를 섬길 것이다."
2. 그들은 그 백성에게 난폭하게 굴었다. 그들의 정열은 자기들의 욕구와 마찬가지로 그릇되었다. 그들이 백성에게 노를 발하고 그들을 가혹히 다스려서 "그 발톱을 찢어버렸던"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 굽을 찢고, 동료 종들을 죽였다. "화있을진저! 이 땅이여! 왕이 어린아이같은 자가 되리라!"
Ⅱ. 그 다음으로, 이 우매한 목자가 자신에게는 어떤 재난을 가져올 것인가를 살펴보자(17절). "게으른 목자에게 화있을진저." 그들은 우상과 같이, 눈을 가졌으나 보지 못하고, 백성들의 수없는 경배와 존경과 제일 좋은 제물을 받고 있으나, 그들에게 아무런 은혜도 베풀지 아니할 것이다. 가장 돌봄을 필요로 할 때 그는 "그 무리를 떠나며," 그들을 궁핍하게 남겨두고, 도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고용된 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이란 하나님의 정의로운 "칼" 이 "그의 팔에, 그의 우편 눈에" 임하게 될 것인데, 그러므로 해서 그는 그 모든 것을 숫제 잃어버릴 것이다. "그의 팔은 아주 말라버릴 것인데," 그렇게 되면 친구를 도와야 될 적에 도움을 주지 못하던 그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의 우편 눈도 완전히 어두워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무리가 처한 위험을 깨닫지 못하게 되며, 구원이 오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는 보는 자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고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실 적에(요 9:39) 이것이 이루어졌다. 선을 행할 은사를 받고도 선을 행치 않게 되면, 받은 것을 빼앗기게 되리라. 일꾼이었음에도 게을러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들은 곧 그들의 팔이 말라버리게 되어도 당연하다. 파수꾼이어야 할 자들이 졸고, 주위를 살피지 않으면, 당연히 그들의 눈이 어두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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