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문제 (마태복음 19:3-12)
바리새인들과 변론함으로써 이혼 사건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반박하는 이야기를 매우 참을성 있게 귀담아 들으셨으며, 그것을 자신의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데 이용하셨다.
Ⅰ. 바리새인들이 던진 질문(3절).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까?" 그들이 이와 같이 질문한 것은 그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며, 그에게서 배우기 위하여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이 이혼 문제에 대하여 그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상반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신 일이 있으셨다(마 5:31, 32).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정면으로 이혼 문제를 논박하려고 하신다면 바리새인들은 이를 미끼로 삼아 그에 대하여 이 지방 사람들의 반감과 분노를 일으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사람들은 그들이 탐닉하고 있던 한 가지 자유인 이혼 문제를 제한시키고 누리지 못하게 하려 하는 자에 대하여는 살기에 찬 분노를 터뜨려 왔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훈의 말씀 중에서 어느 것에 의해서나 또는 이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잃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즉 그들의 시험은 다음과 같이 계획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이혼은 불법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혼을 허락하고 있던 모세의 율법을 거스리는 원수라고 그를 비난하려고 했으며 만일 그가 이혼은 합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의 교리와 가르침이 메시야의 교리나 가르침에 기대된 완전성을 결여한 것으로 헐뜯어 보려고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혼이 묵인되고는 있었지만, 다소 엄격한 사람들은 이혼을 그리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허용하였지만,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이혼의 사유를 어떤 것으로 정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의견 대립이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결혼문제로 인한 소송사건이 그 당시 허다하였는데, 때로는 매우 복잡하고 난처한 경우도 있었다. 그 사건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저촉되어 일어난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욕정과 어리석음에 의하여 생긴 것들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흔히 이혼 문제에 있어서 자기들이 좋을 대로 합의 이혼해 버렸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질문은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연고가 있을 때에는 아내를 버리는 것이 인정되었지만 지금과 같이 일반적으로 난잡한 사람들에 의하여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행해지고 있는 이혼 행위도 인정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부도덕한 사람들은 매우 사소한 이유일지라도 남자 편에서 생각해 볼 때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면, 예를 들어 여자가 보기 싫어지기만 해도 이혼할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이혼을 묵인하여 허락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잘못 해석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신 24:1)이다. 그들은 이 성경 말씀을 매우 광범위하게 해석하여, 아무런 연고가 없어도 그 여자가 미워지고 싫어지면 그것을 이혼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Ⅱ.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양심과 도의에 관한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는 않으셨으나, 매우 효과적인 충분한 대답을 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자의적인 이혼들을 묵인하는 원리들을 단호하게 논박하심으로써 이것이 결코 합법적이 아님을 밝히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합리성을 결여한 법칙을 제시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지지나 근거가 없이 자기의 판단을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즉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의 뜻과 작정에 의하여 완벽하게 하나로 결합이 되었을 때는 어떠한 경우를 물론하고 경솔하게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 그들의 결합이 신성한 것이라면 쉽게 풀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결합을 증명하기 위하여 세 가지로 말씀하시고 계시다.
1.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 그리스도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창조에 관하여 바리새인들 자신의 성경 지식에 호소하고 있다.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그들이 읽어서 익히 알고 있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논증을 하면 매우 유리할 때가 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창 1:27; 5:2)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즉 어떻게, 누가, 무엇으로,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하나님은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한 남성을 위해 한 여성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취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택하여 취할 수 있는 다른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그들의 결합이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와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갈비뼈였다. 그러므로 그 하와를 쫓아내어 버려야 한다면 그것은 그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에 어긋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이 문제를 간단하게 암시만 하셨지만, 바리새인들이 읽은 바 그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언급하심으로써 그 말씀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의미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나머지 피조물도 수컷과 암컷으로 창조되었지만 그 말씀은 그들 중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으며 오직 인간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남녀간의 결합은 이성적이며 단지 감각을 즐겁게 하거나 움직이자를 보존 번식시키는 것 이상의 고상한 목적들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편간의 결합은 짐승들의 암수간의 결합보다 훨씬 밀접하고 확고한 것이다. 또한 짐승들은 아담고 하와처럼 서로 간에 배우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남녀를 표현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단수로 되어 있다(창 1:27)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이 구절을 보면 "그를"과 "그들을"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다. 그들이 둘이 되기 이전에 창조시는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언약에 의하여 다시 하나로 되었을 때 그 하나됨은 더욱 밀착되고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으로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결혼의 기본법.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5절). 남편과 아내간의 촌수는 부모와 자식 간 보다 더 가깝다. 그러므로 부자(父子) 사이의 관계가 쉽게 깨뜨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혼의 결합 관계는 더욱 깨뜨려 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연고가 있다고 해서, 아니 어쩔 수 없는 연고가 있다고 해서 자식이 자기 부모를 죽게 내버려두거나 부모가 자기 자식을 길거리에 내버려도 좋은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남편 된 자는 자기 아내를 더구나 쫓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사이는 혈통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작정하여 가지어 주신 것이므로 그 관계는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보다 더욱 가깝고 그들의 결합은 더욱 강하다. 왜냐하면 한 남자가 자기의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화합하게 될 때에 부자 간의 관계는 결혼에 의하여 완전히 대체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로 말미암아 결과된 결혼이라는 결합은 혈연 관계가 낳은 최대의 결합인 부자 관계보다 더욱 우세하다.
3. 결혼 계약의 성질. 결혼은 인격의 결합이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고 한 몸이다." 한 사람의 자녀들은 그 자신의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의 아내는 자기 자신이다. 부부간의 결합이 부부간의 경우보다 더 밀접한 것 같이,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인체내의 각 지체들 간의 상호 관계와도 같다. 바로 이 점은 남편들이 자기 아내들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요, 또한 그들이 자기 아내들을 쫓아 내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아직껏 자기 자신의 몸을 미워하거나 그것을 잘라 내거나 또한 잘라내려 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잘 가꾸며 귀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들 둘이 이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한 아내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 아담을 위하여 한 하와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추론하시기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배필이다. (sune, reuxe) ─ 즉 그는 함께 멍에를 매게 했다는 뜻으로 그 말씀의 뜻은 매우 깊다. 하나님 자신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무흠한 상태로 제정하셨다. 결혼과 안식일은 하나님이 가장 먼저 정하신 규례들이다. 결혼은 교회의 고유한 규례는 아니고 세상에 속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제정하여 인치셨고 또한 여기에서도 우리 주 예수님에 의하여 인준되었음으로 결혼은 경건된 것으로 다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성별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결혼의 규례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해 양심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면 부부간의 의무를 서로 잘 이행할 수 있게 되며 결과적으로 위로가 넘치게 될 것이다.
(2)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여 짝지어진 것이므로 결코 인간의 어떤 규제에 의하여 나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그것을 나누어서도 안 된다. 남편 자신이나 정부의 어떤 관리도 이 둘 사이를 나눌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것을 행할 권위를 주신 일이 결코 없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말 2:16)고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짝 지워 주신 것을 나누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하나의 일반 원칙이다.
Ⅲ.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대 질문. 이 반대 질문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럴 듯한 질문이다.(7절).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즉 그런 경우에도 아내를 쫓아내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이혼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성경의 근거를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이혼을 인정하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 내에서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은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에게 난제요 큰 거침돌이 된다는 사실이다. 모세는 자기를 택정하신 분에게 충성하였고 또한 주님에게서 받은 말씀만을 명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모세가 명한 것"이라고 주장한 바는 다만 "허용"에 불과한 것이었다(신 24:1). 그리고 모세가 말한 바 그 말씀은 이혼 그 자체를 장려하려는 것보다는 그것이 지나치지 않도록 억제하려고 계획된 것이었다. 유대인 학자들도 그 법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혼은 진중을 기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즉 특정한 이유가 있어야 되고 이혼증서가 반드시 작성되어야 하며 그리고 사법상의 모든 정식 서류를 구비해야만 한다. 그 이혼증서는 자기 아내의 손에 직접 전해 주어야 하며 또한 그들이 다시 합해지는 재결합은 명백히 금지되었었다.
Ⅳ. 이와 같은 반대 의견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1.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관한 바리새인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셨다.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신 24:1)을 "명령"으로 보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허용" 또는 "묵인"으로 보고 있다. 경건하지 못한 세속적 인간들은 한 치를 주면 한 자를 달라고 하기 쉽다. 즉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에 관하여 불가피하게 묵인한 것을 가지고 명령한 것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모세의 하나님께서 백성을 통치하는 행정상의 정치적인 법으로 주신 것이다. 또한 이혼이 묵인된 것은 세속 정부의 여러 가지 사정에 기인하였다. 결혼으로 말미암은 결합은 자연법이 아닌, 강제법에 의한 결과로써 너무도 엄격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를 따라 자기의 거룩성을 침해하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이혼을 폐지시키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이혼을 허용하게 된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음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것은 결코 바리새인들이 특출하거나 신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내어버림을 허락하였느니라." 모세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목이 곧음"을 인하여 불평한 바 있다(신 9:6; 31:27).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목이 곧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들 백성들 상호 간에 목이 곧고 마음이 완악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난폭하고 잔인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들의 아내가 밉고 싫증이 나는 데도 이혼을 못하게 할 경우에는 그 아내들을 잔인하게 취급하여 구타하고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살해까지 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세상에서 가장 완악한 사람은 자기 아내를 학대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특히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악명이 높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아내들을 쫓아내는 것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나약하고 불쌍한 아녀자들이 학대를 당하여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는 것"(말 2:13)보다는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더 나았다. 미친 사람과도 같이 목이 곧고 광란에 사로잡힌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조금 양보하여 이혼을 허락해 주는 것은 더 큰 재난을 예방할 수 있다. 강제법은 자연법을 보존시키기 위하여 폐지될 수 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목이 곧고 비열한 자들이어서 그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마음을 완악하게 먹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혼하는 자유를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너희"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너희"는 그 당시 살고 있던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후손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미리 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규례와 섭리를 인간의 본성과 기질에 적합하게 하시되 두려워하게 하셨다. 계속해서 본문에 보면 모세의 율법은 사람의 완악한 마음을 고려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을 치유해 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돌 같은 딱딱한 마음을 제거하고 살결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준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되었으나, 복음에 의해서는 죄를 정복하게 된 것이다.
2. 그들에게 최초의 결혼제도의 의의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나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규례 중 어떠한 것에든지 부패성이 개재되면 그 부패성은 그 제도가 처음에 제정될 당시의 것으로 올라감으로써 일소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떤 사본이 오류 투성이일 경우 원본에 의해서 검토되고 수정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주님의 성만찬에 관하여 고린도교회 내에 여러 가지 의견이 난립하고 있을 때 그들의 의견을 바로 잡아 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처음 그 성만찬을 주님이 베푸시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였다(고전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 진리는 언제나 처음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구해야만 한다(렘 6:16). 그리고 후대의 견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기의 표준들에 의해서 개혁을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한 법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9절). 이는 그가 이전에 말씀하신 것과 일치한다(5:32). 그 때에는 그 말씀이 설교 가운데서 언급되었었고, 지금은 변론 가운데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1) 음행의 경우에만 이혼을 허락하였다. 이혼을 반대하는 율법의 동기는 바로 이것이다."저들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그러므로 만일 아내 된 자가 음행을 행하여 음행한 남자와 한 몸을 이루게 되면 그 율법의 동기는 종식되고 또한 그 율법도 종식된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음행은 사형에 해당하였다(신 22:22).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좀 완화시켜서 사형대신 이혼으로 벌을 받게 하신 것이다. 휘트비(Whitby)박사는, 우리 주님께서 pornei,a (음행)란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혼전에 범하였으나 결혼 후에야 발견된 부정한 행위로 이 음행을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혼 후에 행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서 이혼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2) 그 외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혼을 불허하고 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이는 그들의 질의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으로써 이혼이 합법적이 아님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복음 시대는 다른 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혁의 시대"이다(히 9:10). 그리스도의 법은 인간을 그의 최초의 순수성으로 회복시켜 준다. 사랑, 특히 부부간의 사랑은 새로운 계명이 l안고 처음부터 있었던 계명이다. 자의적인 이혼 때문에 뒤따르게 되는 가족과 국가의 불행, 혼란, 무질서 등이 어떠한 것인가를 고려해 보면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법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기독교가 세속적인 일에 있어서도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를 알 수가 있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까닭에 이혼을 허락하였고, 그리스도의 법은 이혼을 금하였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은 사랑과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은 온유하고, 결코 유대인처럼 완악하지 않게 될 것을 기대케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화평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 용서를 받고 또한 용서받기를 소원하는 자들처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후로는 "우리를 내어 보내지'(사 50:1) 않을 것을 확신하는 자들처럼 서로를 용서해 준다면 결코 이혼이란 있게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들은 그들의 남편들에게 순종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생명의 은혜를 이어받을 자로서 함께 산다면 이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이요, 이는 모세의 율법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법이다.
Ⅴ. 제자들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법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10절).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제자들 자신들도 이혼하는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그들은 이혼이 결혼 생활에서 얻는 안락함을 보전하는데 편리한 방편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라진 어린아이들처럼 그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게 되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내던져 버리겠다는 식이다. 즉 그들이 원할 때 자기들이 아내를 내어버릴 수 없다면, 그들은 아내를 처음부터 갖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 하시고는 그들을 축복하셨다. 즉 이와 같이 완전히 한 몸으로 결합된 자들이 복 되도다 선언하신 것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부패한 본성은 제약을 참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속박을 산산조각 내기를 좋아하며, 자기 자신의 정욕을 위한 자유를 누리기를 기뻐한다.
둘째, 사람이 세상의 즐거움을 그 안에 섞여 있는 십자가와 같이 고난 때문에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심술궂은 일이다. 이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고 하여 우리가 세상을 뛰쳐나가야 한다는 것과 같다. 또는 어떤 유익한 직업이나 지위도 그 안에 우리가 예속되어야 할 의무를 지워 준다고 해서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 하여 내뱉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어야 하고 그것이 주는 낙을 인하여 감사하며, 그것이 지니고 있는 십자가 를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신 것처럼 양자를 서로 병행시키고 그것을 선용해야만 한다.(전 7:14). 만일 결혼이라는 멍에를 기쁠 대는 내 벗어버리지 않아도 좋은 것이라면 "그러므로" 우리는 멍에를 메지 않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멍에를 메어야 할 때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그 멍에에 자신을 맞추려는 결심을 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혼은 가장 불필요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Ⅵ. 이 이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11, 12절).
1. 어떤 자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인정하셨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말한 것을 인정하셨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라." 이는 이혼을 금지하기 위하여 독신을 장려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에게 성욕을 절제하는 은사를 받아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계속하여 독신으로 머물러 산다면(고전 7:1) 자기들의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원칙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주님의 일을 위하여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고전 7:32-34) 염려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 염려에 대해 보다 덜 고민하게 되고, 그 대신 보다 나은 일들을 하는데 마음과 시간을 쏟아 바칠 수가 있다. 은혜가 증가하는 것은 가족이 늘어나는 것보다 나으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지는 교제는 다른 어떤 교제보다도 먼저 취해야 할 교제가 아닌가!
2. 그리스도께서는 결혼을 금하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으로 보시고 그것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극소수만이 이 말을 받을 수 있다. 그 누구도 이 말을 받아, 결혼하지 않고 지낼 수 없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의 십자가를 반드시 저야 하며, 그 십자가를 피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화형을 당하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스도께서는 결혼하기에 부적당한 것을 두 가지로 말씀하셨다.
(1)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된 것은 재난이다. 나면서부터 고자이거나 사람에 의하여 고자가 된 자 또는 결혼 생활을 영위할 수 없어서 고민하는 자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재난을 상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보다 더 잘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다.
(2)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은 미덕이다. 그러한 미덕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의 것이다. 이는 결혼을 하는데 육신적으로 부적당한 것이 아니라 심적으로 부적당한 것을 의미한다(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 구절을 오해하여 어리석고도 사악하게 육체적으로 자신을 고자로 만든 자들이 있다). 결혼 생활에서 얻는 모든 즐거움에 대하여 거룩한 무관심에 도달하고 그 즐거움들을 전적으로 금할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안에서 확고하게 결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신을 고자로 만든 것이다. 그들은 금식과 극기하는 모든 수단들에 의해서 결혼에의 모든 정욕을 억제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이 말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저들이 결코 결혼하지 않겠다는 서원에 의해서 자신들을 얽매어 놓아서는 안 된다. 다만 그들이 지금 마음으로만 결혼하지 않을 것을 결심해야 한다.
[1] 독신 생활에 대한 이러한 결심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 말을 받지 못하고 "타고난 자라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써 어떤 자에게 주어져 있으나 다른 어떤 자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독신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경험에 의하여 이 은사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 결정하고 또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 37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에는 자신을 그렇게 지킬 수 있을 만큼 결혼의 필요성을 느끼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의지를 다스릴 만한 능력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거짓된 은사를 자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잠 25:14).
[2] 독신 생활은 천국을 위하여 결심되어야만 한다.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 중에는 모든 의무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이기적인 무뚝뚝한 기질을 만족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다른 정욕과 괘락을 누릴 수 있는 보다 많은 자유를 얻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미덕이기는커녕 사악한 악덕이다. 그러나 신앙을 위하여, 그렇지만 (교황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공적을 쌓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마음을 지켜 신앙의 봉사에 전심전력하는 수단으로써 부양가족을 거느리지 않게 되면 우리는 보다 많은 선행들을 할 수가 있다. 그때에만 하나님께서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그 결심을 인정하기고 합당하게 여기신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독신생활이라는 그 조건은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택하여 전념할 만하다. 또한 그 조건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도 가장 좋다. 천국을 위하여 우리가 준비하고 그 천국에 우리가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적합한 조건이 바로 독신생활이다. 즉 천국을 위하여 우리가 선택하고 신앙의 열심을 격려할 목적으로 결단하는 독신생활은 우리 자신과 영혼을 위하여 가장 좋은 환경이요 조건이다.
출처: 매튜헨리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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