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어떤 분이 어거스틴에 관하여 기술을 하였는데 그것에 대하여 반박 댓글을 달아 이해를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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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Cloud의 진술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어거스틴은 기원후 354년에 태어나 430년에 사망한 북아프리카의 히포 주교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초기 기독교 신학과 서방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은 어거스틴의 신학과 생애에 대한 주요 사항들입니다:
1. **어거스틴의 생애**: 어거스틴은 로마 제국 말기에 태어났으며, 그의 생애 동안 로마 제국은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초기에는 마니교에 빠졌지만 나중에 플라톤주의를 통해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왔습니다.
2. **마니교**: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마니교를 신봉했지만, 나중에 이를 버리고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책 "고백록"에서 마니교에 대한 회의와 그리스도교로의 회심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3. **플라톤주의**: 어거스틴은 플라톤주의 철학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기독교 신학과 통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특히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하나님의 초월성과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습니다.
4. **알렉산드리아 철학**: 알렉산드리아 철학(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은 어거스틴의 사상에 일부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그는 주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통합에 집중했습니다.
5. **교황**: 어거스틴은 교황 제도를 체계화하거나 이를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히포 주교로서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교황의 대리자 역할을 확립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6. **신정 정치**: 어거스틴은 신정 정치를 구현하려는 시도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두 도시 이론을 제시하여 세속적인 국가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David Cloud의 진술은 어거스틴의 실제 생애와 사상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와 플라톤주의를 겪었지만 이를 기독교 신앙과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또한, 교황의 대리자 역할을 체계화하거나 신정 정치를 구현하려는 시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댓글:
존 칼빈에게 미친 어거스틴의 영향(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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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이 철저한 가톨릭 신자라는 주장을 검토하려면, 역사적 맥락과 어거스틴이 속했던 교회가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일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속했던 교회는 서방 교회였으며,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신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 역사적 맥락
어거스틴(354-430)은 기독교의 초기 교부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생애 동안 기독교는 아직 동방 정교회와 서방 교회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교회는 통합된 형태의 기독교 교회였으며, "가톨릭"이라는 용어는 "보편적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 어거스틴의 신학과 가톨릭 교회
1. **어거스틴의 교회론**: 어거스틴은 교회의 일치와 보편성을 강조했으며,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모든 기독교인이 공유한 일반적인 믿음이었으며, 특정 교황제도나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2. **구원론**: 어거스틴의 구원론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는 나중에 개신교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행위에 의한 구원 교리와 다릅니다.
댓글:
어거스틴의 신학 체계에 따르면, 로봇처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먼저 다시 태어나야 하고 그 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가항력적 믿음을 받아야 구원자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그래야 그는 로봇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로봇 조절 프로그램 혹은 리모컨에 의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구원과 관련된 이 모든 일은 오직 [카톨릭] 교회와 교회의 제사장들이 베푸는 성사(聖事)11)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국가 교회에 예속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명령에 따라 살고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교회를 그리스도가 주인인 기독교(Christianity)가 아니라 교회가 주인인 ‘교회교’(Churchianity)라고 부른다.12)
시간이 흐르면서 어거스틴의 ‘교회교’ 사상은 결국 로마 카톨릭교회가 세상 국가들 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침이 되었고 중세에 예수님의 자유 교회를 억누르는 무기로 이용되다가 1,200년이 흐른 뒤에는 마침내 개혁 교회 및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그대로 반영되어 제네바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어거스틴의 삶과 저서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로마 제국과 기독교 그리고 어거스틴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알려진 콘스탄틴 황제의 행적을 역사적으로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3. **성례전**: 어거스틴은 성례전을 중시했으나, 그가 이해한 성례전은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 체계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성례전 이해는 교회의 보편적인 신앙이었고, 후에 세분화된 교리적 차이들이 명확하게 형성된 이후의 로마 가톨릭 신앙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댓글:
11) 성사(sacrament)란 카톨릭교회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종교 의식을 뜻하며 여기에는 유아 세례, 견진, 고해(고백), 성체(미사), 신품, 혼인, 종부 성사가 있다. 이 중에서 성체 성사는 미사 때 제사장(신부)에 의해 축성되어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의식을 뜻하며 이를 영성체(領聖體)라고 한다. 성체 성사는 일곱 성사 중 가장 큰 성사로 다른 성사들은 성체 성사를 위한 준비이고 영성체로 완성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댓글 끝
### 교황 제도와 권위
어거스틴의 시대에는 교황 제도가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의 권위가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어거스틴 사후 수세기 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어거스틴은 교황의 절대적 권위보다는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를 강조했습니다.
### 어거스틴의 위치
어거스틴은 히포의 주교로서 지역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신학은 나중에 서방 교회의 기초가 되었지만, 이는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거스틴의 사상은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교리적 강조점들은 종교개혁의 주요 토대가 되었습니다.
### 결론
어거스틴을 철저한 가톨릭 신자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가 속했던 초기 기독교 교회를 동일시하는 데서 오는 오해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신앙과 교리적 강조점들은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을 단순히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신자로 분류하는 것은 그의 복잡한 신학적 유산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합니다.
댓글:
어거스틴과 국가 교회
콘스탄틴이 세운 ‘국가와 교회의 일치’는 결국 구약 시대의 ‘신정 정치’(Theocracy) 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신정 정치란 신성한 주권을 갖는 신이 임명한 대리자에 의한 정치를 말하며 ‘신권 정치’(神權政治)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 <네이버 지식백과>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정 정치에서는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이 분리되지 않고 융합되어 있으며, 권력자의 명령은 곧 법이고 피지배자의 내면적 심정(心情)까지도 지배한다. 국가의 법은 신의 법 또는 명령이며 국법과 종교가 동일하다.… 이러한 정교일치의 동심원적 권력 지배는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모세가 건설한 신정 국가의 정치가 가장 전형적이다. 신정 정치는 고대 오리엔트, 이슬람 세계,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도 각 문화의 원형과 관계하여 독자적 형태를 보인다. 신정 정치의 근대의 전형으로서는 칼빈(John Calvin)의 제네바 지배를 들 수 있고, 현대의 신정 정치로는 혁명 후의 이란 정부를 들 수 있다.18)콘스탄틴과 그 이후의 로마 황제들은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신정 정치를 구현하려 하였으며 바로 이 일을 위해 이론을 제공한 사람이 어거스틴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교회의 황제인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세상 왕국들까지 다스리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통치 모델을 완성하였다. 어거스틴의 ‘국가 교회’ 사상은 1,000년 이상 중세 시대를 지배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칼빈이나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들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서도 세력을 떨치며 신정 국가를 세우는
데 초석이 되었다.
‘선진국들의 정교 관계’라는 글에서 이범성 교수는 제정일치(祭政一致) 혹은 정교일치(政敎一致) 시스템인 국가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구약 시대의 전통은 제정이 일치되거나 적어도 정교가 분리되지 않은 형태를 취했지만 신약 시대 복음 전도자들의 전통은 정교가 분리된 형태를 취했다.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그대로 제자들 의 의견이 되었고 정부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말도 정교 유착이 아니라 정교분리 를 의미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확산되던 4세기 초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손자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국교화했고 이로써 정교 유착(신정 정치) 시대가 왔다.
종교 개혁을 맞으면서 로마 카톨릭 교권에 대한 민족 국가들의 반대는 정교분리가 아니라 정교일치의 새로운 형태를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것은 교황과 황제의 제국적 정교일치를 개신교 주교들과 왕 혹은 성주들의 정교일치로 전환한 모양에 불과하다. 여전히 더욱 밀접하게 교회는 국가의 보호를 필요로 했고 국가는 교회의 인정을 필요로 하였다. 루터는 독일에서 정부의 권력에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정부와 교회의 선한 역할 분담론을 선전했으며 칼빈은 스위스에서 교회의 적극적 정부 활동을 장려했다. 한편 헨리 8세의 수장령을 통한 영국 국교회의 탄생은 로마 교황청 대신에 정부와 더욱 밀착된 정교일치를 가져왔다. 종교 개혁은 정교분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형태의 정교 유착에 불과하다.19)
콘스탄틴과 어거스틴을 거치면서 신정 정치 모델이 확립된 이후로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서유럽의 모든 국가는 오직 카톨릭교회만을 국가의 교회로 인정하였고 천주교 외의 다른 믿음은 모두 이단 교리로 정죄받았다. 반면에 동유럽은 정교회(Orthodox Church)가 국가 교회가 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긴 루터교 역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삼국의 국가 교회가 되었고 칼빈의 장로교는 낙스에 의해 스코틀랜드의 국가 교회가 되었으며 헨리 8세가 세운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는 잉글랜드의 국가 교회가 되고 말았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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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과 칼빈주의 신앙 간의 관계는 매우 깊고 중요합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적 사상은 종교개혁 시대에 칼뱅(존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거스틴의 여러 교리적 강조점은 칼빈주의의 주요 교리들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를 몇 가지 주요 주제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 1. 원죄와 전적 타락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인간이 아담의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그로 인해 자유 의지를 통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칼빈주의**: 칼빈주의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교리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타락을 강조하며,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주장합니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와 일치합니다.
### 2. 무조건적 선택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나 공로에 의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주권적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칼빈주의**: 칼빈주의의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교리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선택할 때 그들의 행위나 공로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어거스틴의 사상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 3. 유효한 은혜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이며, 선택된 자들에게 반드시 효과를 발휘한다고 믿었습니다.
**칼빈주의**: 칼빈주의의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된 자들에게 반드시 구원을 이루신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어거스틴의 은혜 이해와 일치합니다.
### 4. 성도의 견인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참된 신자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칼빈주의**: 칼빈주의의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교리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잃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교리도 어거스틴의 신앙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 5. 이중 예정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구원하기로, 어떤 사람들은 정죄하기로 예정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이중 예정(Double Predestination) 개념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 뜻에 따라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또는 정죄하기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합니다.
### 결론
어거스틴의 신학은 칼빈주의 신앙의 주요 교리들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측면에서 일치합니다. 칼빈주의는 어거스틴의 교리들을 발전시키고 체계화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사상은 칼빈주의의 신학적 기초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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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에게 미친 어거스틴의 영향(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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