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컴퓨터선교회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41216
초기 한국 기독교사
천주교의 한국 전래
(‘한국기독교회사’-민경배-중심으로)
제1편. 근대 이전의 기독교와의 접촉
묘하게도 기독교는 한국 역사의 비극적인 위기 마다 언제나 한번씩 접촉한다. 그러나 그것은 접촉으로 끝났을 뿐, 역사적인 중요성을 남긴 체계적, 지속적 선교의 진행은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지나가곤 했다. 그 실현은 18세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본 1편에서는 이런 접촉의 예를 살펴본다.
1.당을 통하여 접촉된 경교
로마제국에서 이단으로 단죄된 네스토리우스파의 신앙이 동방으로 옮겨오면서 중국에서 경교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당 태종때 중국에 들어온 경교가 신라와 접촉한 예가 발견되었는데 금강산 장안사에 중국 경교 기념비와 똑같은 모조품이 발견되었고 또한 불국사 경내에 돌십자가가 발견되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팔라디우스(Palladius)가 명나라에 들어와 한 책자에서 당나라 때 경교가 성행 하였다는 구절이 있는 책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한국 책이었다고 한다.
2.몽고를 통하여 접촉된 천주교
십자군을 십여 차례 파견하고도 정복하지 못한 예루살렘을 몽고가 쉽게 점령하고 기독교인의 순례를 자유롭게 해주자 교황 이노센트 4세는 기육 칸(칭기스칸의 후계자)를 개종시키고자 선교사를 파송했었다. 별 결실을 보지 못했는데 이때 선교 사절단 중에 루부루크(Guillaume de Rubruc)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한국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교황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당시 몽고가 고려을 이용하며 일본을 침략하고자 한 것에 대해 말하면서 이때 고려를 카울레(Korea)로 소개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고려의 이름이 교황청과 세계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3.일본을 통하여 접촉된 기독교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열세의 위기를 느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세확장의 전략을 세우는데 이때 이그나티우스 로율라과 프란시스 사비에르(Xavier:1506-1552) 중심의 예수회가 탄생되었다. 이중 사비에르는 인도와 극동에 파견되어 1549년 7월에 일본 규슈에 상륙했다. 당시 일본의 통치자 노부나가의 관용아래 예수회 신부들의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다음의 실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는데 이는 오랫동안 일본안에 쌓여온 무사들의 힘을 분산시키고 이들이 거할 땅을 확보하여 일본 안의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조선 정벌의 이유로서 그가 반 기독교적인 감정에 끌려 군 안에 있는 기독교도들을 전장에서 희생시켜 없애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 근거로 당시 부산에 도착한 침략군 25만명 중 최소한 10%가 기독교도인 이었다는 것이다. 이중 고시니 유키나가 휘하의 군인들은 거의 경건한 기독교도들이었다고 한다. 프로테스탄트 구츨라프(1803-1849)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군들은 거의 전부, 사병들도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이때 고니시를 비롯한 몇몇 장군들은 십자가 형상이에 그려있는 깃발을 앞세우고 전진하면서 온갖 잔신한 살상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때 어려움에 처한 조선을 돕는다고 명나라에서 군인을 파견했는데 이때의 총사령관이 마테오 리치를 방문하여 군사 작전을 짰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예수회에서, 중국에서도 예수회가 각각 작전을 교사하고 있었다.
이 전쟁의 와중에서 고니시는 자기 부하들을 위해 종군 신부를 보내달라고 일본 예수회에 편지를 써보냄으로서 포르투갈 신부 세스페데스를 파견했다. 이로서 그는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성직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본군을 위해서만 활동했지 비운에 우는 한국인에 관해서 관심을 가졌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일본 장병 몇 사람이 기아에 지친 조선 소년에게 衣食을 주고 200여명의 어린이에게 성수를 뿌려 세례를 베풀어 승천하게 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올 뿐이다.
세르페데스의 조선체제 기간은 약 반년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고니시가 세르페데스를 조선에 데려와 모반을 꿰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 그가 더 이상 조선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르페데스는 전쟁중 조선의 비전투원들을 노예로 끌려가 포로투갈 상인들에게 팔려가는 참상을 목격하였다. 이 때 선교사들은 이런 노예 매매를 금할 것을 일본 당국에 건의하며 포르투갈 상인들의 손에서 조선인 노예를 구출하고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해주기까지 했다. 또한 이들은 조선어로 번역된 각종 교리서들을 가르치고 이들을 복음의 길로 인도하려고 애썼다. 이로 인해 일본 내의 조선인들 간에 많은 신자가 생겼다. 그러나 도요토미 이후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엄격한 기독교 박멸정책을 쓰므로 수많은 조선 포로 신도, 혹은 귀화 신도가 순교, 이중에는 일본 기독교 사상 이름을 남긴 수백명 중에 투옥 형고를 치른 사람이 25명, 순교자가 21명이 있었다. 이중 9명은 로마 교황청에 의해 순교 복자로 시복되었다.
이를 계기로 예수회를 비롯한 카돌릭 교회의 여러 선교회 및 교단에서는 조선에 대한 선교의 관심을 꾸준히 유지하게되었고 기독교는 조선에 끈질긴 접촉을 시도한다. 그러나 임진 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에 대해 깊은 불신의 벽을 쌓아가게 되어 자연히 기독교는 중국을 통해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제 2편 한국의 로마 카톨릭 교회
4. 선교 이전의 求道
4-1.병자호란과 소현세자
1637년 남한산성 삼전도에서의 굴욕을 끝으로 병자 호란이 끝나면서 소현 세자를 비롯해 끝내 청나라와 화의를 배척했던 충신들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는데 이때 기독교와의 접촉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다. 북경에 머물던 소현 세자는 예수회 신부 아담 샬과 친교를 맺고 다른 선교사들의 저작에 접촉하게 된다. 당시 예수회의 전략은 한 나라의 상류 계급이나 혹은 왕궁에 접근해서 문화적, 종교적 영향을 끼쳐 온 나라의 개종을 이루고자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어 아담 샬과 소현 세자와의 접촉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소현 세자가 오랜 볼모생활을 끝내고 환국할 때 아담 샬은 그가 지은 천문, 산학, 聖敎正道 등 여러서적과 천주상 한 장을 선물하였다. 이때 소현 세자는 西敎는 물론 서양과학에 관한 책을 조선에 퍼뜨리려고 했으나 1644년 귀국 70일 만에 학질로 세상을 떠나므로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4-2.조선 학자들의 西學 접촉
1653년 제주도에 네델란드의 하멜이 표류해 들어와 13년간 머물면서 서양 문물과 접촉하는등 외국 풍물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서 조선도 자연히 문예부흥 이후의 근대화의 물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조선의 학자들은 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관심은 자연히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수광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1614)에서 天主實義에 대한 논평을 했는데 그는 그 서두에 천주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으며 안양(安養)의 도(道)로 세상을 주관하심을 논했으며 사람의 혼이 불멸하는 것을 보더라도 짐승과 크게 다르다고 하였다. 그는 기독교리와 비교해 불교의 교설인 윤회가 잘못되었다고 변론하였다. 그리고 인성을 원래 착하다하며 敎化皇(교황)에 대한 언급을 했다.
이익(1681-1763)은 청을 통해 받아들인 서학의 과학지식과 천주교의 윤리 사상을 핵으로 삼아, 주자학적 전통에서 중국 것만을 절대시하고 있던 당시의 학풍과 생리에 반발을 느끼고 중국적인 것을 감연히 비판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윤리에 반한 바 있어, 성호사설에서 그 교훈 중에 “유교에 없는 것이 있다‘라고 분석하면서 유학적 가치관을 객관적으로 비판까지 하고 있었다. 그는 서교의 진리를 ‘불변의 진리’요 ‘지극히 올바른 진리’라고 하면서 ‘성인이나 선비가 다 따라야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도 천주실의에 대해 논평했는데 지봉의 것과는 약간 다르다. 그는 마테오 리치의 天主가 유가의 上帝와 같다고 하였으나 경건과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는 佛氏의 석가와 같다고 추정하였다. 그는 또한 예수의 처녀 탄생, 선교,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의 가르침이 유럽 여러 나라에 퍼져 있음을 말하기도 했다. 성호의 평에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가 제쳐지고, 순수한 서학의 기본적 가르침이 부상되고 있었다. 이외에 안정복(1712-1791), 신후담(1702-1761),이헌경(1719-1791), 이이명, 박지원, 홍양호 등 당대의 석학들이 서학을 탐구하였다. 의술이나 수학 농학의 경로를 통해서 서교에 들어가는 이들이 필경 그 敎의 신기함에 눌려 다 확실히 믿었다는 증언이 있다.
천주교를 학구적으로 연구하는 석학들 가운데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고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한 사람이있었다. 허균(1569-1618)이 1610년에 중국에 가서 카톨릭의 기도문인 ‘게(偈)‘ 12장을 가지고 들어와 유학자들과 논쟁을 벌리고 조선 사람으로서 처음 서교, 곧 천주교의 신앙에 전향했고 1618년 사형에 처해졌다. 이익의 제자인 홍유환이 1770년대부터 복음에 관계된 책을 여러 곳에서 수집하여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애썼다. 그는 그리스도의 축일이 7일 마다 있다는 것을 알고 매달 7일 마다 모든 생업을 쉬고 안식하였으며 또 모든 욕망을 악하다 하여 산에 들어가 숨어살았다.
천주교의 확장을 살펴보면 성균관 유생 송도정의 疏文을 보면 이미 1758년에 해서, 관동 지방에 집집마다 상당 수의 백성들이 사당을 부수고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서교 신앙에 인도되었다고 하였다. 이 지역은 서러움과 박해를 받아오던 곳이었는데 어쨌튼 18세기 초 조선 천주교인들은 세례를 받지 못한 채 교회와 성직의 사목과 관계 없이 다만 책에서 얻은 복음의 지식을 실제로 삶에 옳겨 놓는 특수 상황이 전개 되었다. 문제는 조선 정신 생활의 기조를 이루어 온 제사 문제를 공격적으로 다룸으로서 후에 박해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4-3. 이승훈의 入信과 조선 천주교회의 터
남인에 속해 있던 여러 학자들이 기독교에 관한 확실한 연구를 진행시킬 서적과 자료의 결핍을 탄하고 있다가 마침 북경의 謝恩使 일행과 동행한 이승훈이 그곳에서 기독교를 알고 신앙고백하며 공적인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그는 그의 신앙 고백 위에 한국 교회의 주춧돌을 놓는다는 의미에서 세례명을 베드로로 받았다. 이때가 1784년 2월이었다. 한국 최초의 세례 교인으로서, 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도에 의해서 입신 수세한 이승훈은 중생한 사람으로서 그해 3월 여러 권의 교리서와 십자가상, 성화, 묵주, 그리고 기하학 책들을 품고 본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피곤치 않는 정성으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5년이 지났을 때의 신도 수는 4천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게 한 사람이 이익의 증손 이벽인데 그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영세명이 요한이었는데 당시 유학의 대가인 이가환이 문책하러 달려왔을 때 정연한 이론과 명확한 논증으로 그를 굴복시켰다. 이벽의 전교에 따라서 권일신과 권철신, 그리고 정약용(1762-1836), 정약전(1758-1856), 정약종(1760-1801) 삼형제가 입교했다. 이들은 1785년부터 서울 진고개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이백은 靑巾을 두르고 교리 강습을 하기도 했는데 그는 안수받지 않은 채로 신부의 소임을 다해 나간 것이다. 이는 성직 없는 교회의 놀라운 한 실례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교회가 먼저 생기고 후에 선교사가 들어온 전례 없는 역사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1785년 형조(刑曹)에서 진고개 예배 장소를 급습하여 여러 명을 체포, 훈방하고 김범우만 잡 옥에 가두고 고역을 치루게 한 후 충청도로 유배를 보내었는데 그는 수주일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의 피가 그에게서 흘러 나왔다. 후에 김범우의 집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명동 대성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신앙의 미숙이 있고 또한 전문 사역자가 없어 교리의 바른 이해가 결여 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이런 자생적 교회의 탄생은 한국 교회의 효시가 되었고 실제적으로 천주교의 뿌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이벽은 배교로 번민 가운데 1787년에 죽고 이승훈은 문초를 받으면서 斥邪文을 발표하고 배교하였다.
5. 체제와 전통의 이질로 경험된 기독교
- 辛亥와 辛酉의 敎難 -
5-1. 辛亥 敎難(1791)
조선의 카돌릭 교회는 인조 이후 싹을 내기 시작하여 영조 때에는 해서, 관동의 민간인 층에서 상당히 넓게 보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종 때에 와서도 正學이 바로 서면 서교 같은 邪學은 스스로 자멸하리라 보고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정조 신해년에 전라도 진산의 유학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기독교 신앙을 묵수한다하여 제사를 폐하고 神主를 불사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조정에서 패륜외도로 여겨 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참형에 처하는 교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해서나 관동 지방 사람들이 서교로 기울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크게 관여하지 않았으나 나라의 제도나 정치 및 정학의 중추에 서야할 호남의 士類들이 서교에 기울어진 것은 큰 문제가 된다고 본 것이었다. 이 신해 교난의 여파로 이승훈도 예산 쪽으로 정배를 떠나게 되었고, 또 홍문관 소장의 방대한 수의 서양 서적들과 家藏의 서양서들이 불태워져 없어지게 되었다.
5-2. 辛酉 敎難(1801)
信西派인 영의정 체제공이 세상을 떠나고(1799) 현군 정조가 1800년에 서거하자 어린 순조의 섭정으로 정순황후가 정사에 간섭하면서 박해의 격류가 터져나왔다. 신서파는 주로 전라도 중심의 南人들이었는데 이들은 사도세자에게 동정한 파벌에 가입하므로 정순 왕후는 당시의 경주 김씨 세도와 西人의 힘을 배경으로 서학을 사학으로 규정해 박멸하도록 하므로 신유 교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명분은 기독교가 비 인간적이고 체제 도전를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이때 오각 작통법을 실시하여 사류를 지칭하되 그 씨까지도 남기지 말도록 하였다. 이로써 이가환, 권철신이 혹형으로 옥사하고 이승훈, 최필공,정약종이 참수 당하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포교 중에 있던 청나라 신부 주문모도 자수하여 처단당했다. 이로서 조선 교회는 이후 30년간 신부 없는 교회가 되어 고군분투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문모에게 세례를 받은 恩彦君의 부인 송씨와 자부 신씨도 賜藥에 처해졌고 얼마후 은언군 자신도 賜死를 당해야만 했다. ‘천지 주재 만물’, 이 신앙 때문에 천주교도들은 당시의 왕권에 도전한다는 죄목으로 모진 형극의 길을 걸으며 처단되었다.
6. 황사영의 帛書事件
황사영은 정약종의 사위로서 주문모 신부를 남달리 사사한 사람으로서 열렬한 신도였다. 그는 교난의 위기를 극복할 계략을 꾸몄는데 이것이 백서 사건이다. 그는 이 백서를 북경 주교에서 보내어 조선의 천주교도들의 참혹한 박해상황을 알리며서 청국 황제를 움직여 그 명령으로 조선이 천주교를 용납하도록 압력을 가하되 청의 宗女를 조선의 공주로 삼아 조선 국왕과 결혼케 해서, 국왕을 청의 뜻에 순종하게 할 것을 건의한 것이었다. 또한 서국의 여러 천주교 국가를 움직여 수백척의 선박에 정병을 싣고 대포등 군물을 싣고 와 조선을 쳐 선교의 승인을 강력히 요구해 줄 것을 건의하고 있었다. 더욱이 내용의 맨 마지막에서는 우리 나라가 없어져도 聖敎의 표는 남아 있어야할 것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사전에 발각되어 천하에 알려지면서 백성들도 천주교를 대역반도의 매국의 종교로 보게 되었다. 이로 인해 황사영은 27세의 나이에 1801년 11월에 능지 처참되었다. 이해 옥사로 순교의 피를 흘린 교인의 수가 3백을 넘었다.
이후 정순 황후는 청국인 주문모에 대한 처형의 경위를 설명하는 서한을 작성하여 청나라 인종에서 바치게 하고 국내에서는 토사 교문을 내렸다. 그 내용으로는 근래에 서력이 비밀리에 우리 나라에 수입됨을 통탄하면서 한마디로 서교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망상을 낳는다고 힐책하였다. 그리고 서교에 입교한 사람들의 반역의 요소가 신앙으로 둔갑할 가능성을 미리 밝히며 비밀 집회를 단죄하였다. 이후 조선은 서학의 창궐을 염려하여 엄격한 쇄국 정책을 쓰게 되고 북경 왕래를 제외한 모든 외교 관계는 삼엄한 통제하에 단절되었다.
7. 정하상의 上帝相書
- 조선인의 신앙 -
7-1. 조선 교구의 설립
앞서 말한 신유 대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우들은 순교 정신을 발휘하여 교세의 만회에 힘쓰면서, 아울어 북경 주교와 연합하여 목자를 보내줄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1811년 권요안은 교황청에 ‘병선과 사절단’을 보내달라는 탄원서를 발송했고 정약종의 둘째 아들 정하상(1759-1839)은 1816년 북경에 제 발로 들어가 주교를 만난 조선의 딱한 사정을 피력하고 선교 사목의 실현을 약속 받고 싶었했다. 그런데 이런 소청을 쓴 그의 편지가 교황 레오 XII세에게 전달되었는데 교황 레오의 서거로 뒤를 이은 그레고리 XVI세는 교서를 발표하여 북경 교구와 완전히 독립된 조선 교구를 설치하고 초대 주교로 프랑스인 브뤼기에르 신부를 임명하였다.(1831.9.9) 이는 조선의 독립성을 종교적으로나마 청국의 종주권에서 분리 시킴으로서 한 민족 국가의 독립 의식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당시 북경교구에는 주로 포르투갈계의 신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조선 전교를 북경 교구 관할 아래 두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교황이 조선 교구를 독립시키고 그것도 프랑스인 신부를 주교로 임명하므로 교황청과 북경 교구 사이의 갈등이 있었다. 이때 청국인 주교인 유방제가 청의 종주권을 의식하고 여기에 개입, 조선 교도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거 입국 거절 편지를 쓰게 되었다. 이에 브뤼기에르 신부는 마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조선을 향해 출발했고 4년 만에 만주에 도착,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 모방이 서울로 잠입했고 2대 주교로 앙베르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각각 서울로 잠입해 전교하므로 교세는 신도 9천에 이를 정도로 확장되었다.
7-2. 상재 상서의 저작 동기:
- 己亥 大敎難 -
이렇게 다시 서교 세력이 확장 되자 1839 기해년, 조정에서는 다시 한번 사학에 대한 대 핍박을 가하였다. 이 교난은 1839년 3월부터 시작해 1840년 12월에 끝났는데 순교자수는 113명에 이르렀다. 이때 앙베르 주교는 다른 두명의 서양 신부에게 함께 순교의 길을 가자고 제안하여 이들 세명은 손에 손을 잡고 한강 새남터에서 극형을 받았다. 1839년 9월 21일 이들은 서양인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때 헌종은 斥邪윤음을 발표하여 천주교가 망국적 사교임을 설파하였다. 이때의 윤음이 국한문 병용이었다는 것은 당시 서교의 신앙이 하류, 婦庶層에 까지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있어 이들에게도 읽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7-3. 정하상과 상제상서
기해난이 한창일 때 우리 나라 최초의 護敎論이라고 할 수 있는 上帝相書가 나타났다. 정하상의 이 글은 ‘조선인’의 얼과 그 바탕에서 움튼 겨레의 단심에 맺어진 신앙인의 고백이었다. 황사영은 밖으로 눈을 돌려 구제를 요청했고 정하상은 안으로 눈을 돌려 임금과 겨레에게 혈연으로 호소한 것이라 할 수있다.
조선조의 시작에는 숭유사대의 명분으로 숭유 배불의 정책이 있었다. 이퇴계에 이르러 斥佛論이 정통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것이 후에 카톨릭 교회가 도입될 때 똑같은 논리로 斥西論으로 둔갑하였다. 척서론의 입장에 서 있던 안정복(1712-1791)은 천학고, 천학문답 등의 저작을 통해 기독교의 천당 지옥설이나 신관, 영혼 불멸, 장생, 영생의 사실은 불교의 교리와 같다고 몰아 유교의 도에 벗어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이때 정하상은 불교를 공격하며 카톨릭 신앙이 불교와 유사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無害正道 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첫째 그는 기독교가 윤리적 현실성이 깊다하며 십계는 치국이념에서 보아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였다. 둘째로 그는 경교가 당대에 이미 중국에 들어와 상하 조야에 널리 퍼졌으며 명과 청에서의 선교사들의 업적과 그 조정의 총애를 빠뜨리지 않고 고증해가며 기록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천주교는 지극히 거룩하여 孔孟程朱 의 정도를 벋어나지 않으며 성서는 詩書禮樂과 다름없이 하늘을 섬기라 했다는 논증을 했으며 마지막으로 천주교인이 나라에 뜻을 잃은 자들이 아님을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조선 사회의 윤리와 미덕이 기독교 정신 속 에 있음을 변증하므로 천주교 신앙이 민족얼과 접속 되기를 바랐다.
황사영과 매부 관계에 있었던 정하상은 1839년 9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7-4. 서교와 조선 서민 문학
현석문(1799-1846)은 기해년 천주교 수난사를 기록한 己亥日記를 썼다. 그는 상해까지 가서 자료를 수집해 3년만에 탈고하였다. 조선의 천주교회는 일찍부터 한글 교리서와 문학의 저술 간행에 전심해왔는데 정약종은 主敎要旨 두권을 저술한 바 있고 앙베르 주교는 동료들과 함께 인쇄기를 차려 놓고 각종 교리서를 한글로 펴낸 바 있다. 이외에 언문천주실의, 언문칠극,언문성년광익 등의 책이 나왔으며 카톨릭 교회는 조선 어학 진흥을 위해 ‘조선 문법’.‘라틴-조선-중국어 사전’등도 만들었다. 그러나 다 압수당 당해 소실되고 말았다.
8. 근대조선의 대외접촉과 諸敎難
8-1. 김대건의 순교
3대 주교 페레올신부가 1845년 8월에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였다. 김대건은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마카오에 유학하게 되어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로 서품을 받고 한달 후 입국한 것이다. 입국한 그는 외국인 신부 입국 안내의 사명을 띠고 황해도 연안 답사를 갔다가 軍校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때마침(1846) 프랑스 함정 세척이 충청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기해년에 참형된 세 프랑스 신부의 처형을 힐책하고 책임있는 회신을 받겠노라고 영의정에 편지를 발송한 것이 화근이 되어 헌종은 김대건 신부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영을 내려 그는 새남터에서 참형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는 조선인 최초의 순교 성직자가 되었고 그의 머리 유해는 현재 카톨릭 대학 신학부 성당에 모셔져 있다.
8-2. 丙寅敎難(1866)
병인교난의 두가지 원인으로 첫째는 카톨릭교의 수적 부흥이다. 헌종 이후 즉위한 철종은 신유 교난때 서교 신자라는 이유로 죽게된 은언군의 직손이었기 때문에 카톨릭에 대한 분위기가 좋았고 철종 5년 제 4 대 주교 베르누 신부가 4명의 서양 선교사를 대동하고 입국하여 열심히 전교하므로 1857년에 교세 1만 3천을 확보하였다. 1865년 고종 2년에는 2만 3천의 신도가 있었고 외국 선교사만도 12명이나 되었다. 이 수적 확장이 박해의 실마리가 되었다.
둘째는 좀더 직접적인 것으로 당시 러시아가 함경도에 여러 번 침공하므로 홍봉주, 김긔호, 남종삼을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대원군의 카톨릭과의 친분을 근거로 朝.佛.英 삼각 동맹을 맺고 이들 나라의 힘을 빌어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대신 신교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천주교도들이 올린 건의문 내용이 비속하고 논지가 조야하여 대원군의 비위를 거스린데다가 당시 朝野는 치열한 배외사상, 그리고 서학 禁壓의 열의에 젖어 있었고 이에 호소하는 글발이 사방에서 날아들었었다. 때마침 변방에 드나들던 러시아의 발길도 뜸해졌고 청국에서도 서학 강타의 정책이 있던 차,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들에게 걸었던 기대를 포기하고 당시 거센 여론에 부응하여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병인 교난이다. 이때 대원군은 외국인 신부들을 불러 이들이 개종하고 국외로 물러가도록 했으나 이들이 이를 거절하므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에서 5명의 외국인 신부가 새남터에서 참형을 당하고 ‘한국 통사’ 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모두 12만명이 순멸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좀 과장된 숫자라고 한다. 가장 신빙할 만한 수는 3년간의 순교자수가 8천명이었다는 것이다. 이 교난를 피해 산과 들로 피신해 가 굶주려 죽게 된 사람수를 합치면 그 수는 배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병인교란을 피한 리델 신부는 조선 교도 11명과 함께 한국을 빠져나가 천진에 있는 프랑스 공사와 제록 로즈를 만난 조선에서의 처참한 박해를 자세하고 보고하였고 이에 격분한 로즈 제독이 조선 침공을 결의하고 1차로 한강 서강에 2차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까지 동원해 군함 7척으로 강화도 앞바다에 들이 닥쳤다. 이때 리델 신부가 이 함대의 통역겸 향도가 되어 결국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의 走狗에 지나지 않음이 입증 되어버렸다. 이들은 강화도에 상륙하여 살상과 귀중한 史庫를 소각시키고 그 일부를 약탈해 갔다. 이에 대원군은 이제 천주교이면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기로 하여 외국인들이 더럽힌 땅을 서학인의 피로 씻어야한다며 양화진 강가에서 숱한 교인들을 처형하였다.
8-3. 辛未 敎難과 미국
병인년(1866)8월, 미국적의 상선 제너널 셔먼호가 모호한 항해 목적을 가지고 대동강 깊숙이 나타났는데 상역선으로 어울리지 않게 무장을 하고 있었다. 이에 평양 관리들은 교역 개방이나 종교 전파가 다 금지 되었으니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셔먼호 선장이 이를 거절할고 상류의 수심을 측량하는 등 정박을 하고 있었고 이를 말리던 이현익을 오히려 나포하여 배에 감금하는 등 무모를 범했다. 이에 평양성민이 아우성 치자 이들을 총을 소며 살상자를 내었다. 이러던 중 대동강 수위가 갑자가 줄어 꼼짝 못하고 있을 때 평양 수비군이 공격하여 셔먼호를 불질러 버렸다. 이에 미국은 1866년 12월과 1868년 3월에는 군함을 각각 황해 연안과 대동강 어구에 파견하여 사건을 조사하고자 했으나 성과가 별무였다.
그런데 1869년 4월에 프랑스 선교사 페롱이 대원군의 생부 묘소를 도굴해 그 유물을 차지하고 있음으로서 대원군과 교섭해, 信敎의 자유 획득과 교환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페롱과 함께 피난 간 두 세 조선 신도들의 착상이었다. 그리고 실제 이들이 구만포에 상륙하여 남연군의 묘소를 도굴하였다. 이에 격분한 대원군과 조정은 이에 천주교인들이 연루된데에 큰 충격을 받고 그해 4월에서 9월 사이에 24명의 교도가 각지에서 순교 당하게 되었다.
대동강에서 셔먼호가 소실된 지 5년이 지난 1871년 3월에 북경주재 미국 공사 로우가 청국 총리아문을 통해서 조선 조정에 대해 그 해명을 다시 물어왔다. 이에 조정은 평양의 일은 그 배가 멸을 자초한것이라고 하며 여기에 대해 다시 변설이 필요없다고 하였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미국은 로저스 제독의 극동 함대 군함 5척을 이끌고 왔다. 그러나 이들은 침공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부질없고 맹목적인 파괴와 살상을 감해하고 퇴거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조선 카톨릭 교인들이 이 미군함을 찾아가 연락을 맺으려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종로 네거리에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조정은 천주교인들 진멸에 나섰고 이 박해는 대원군 치정말기까지 이어져갔다.
8-4. 조선 천주교회의 신앙 형태
조선에서의 카톨릭 교회의 선교 역사는 이처럼 처절한 순교와 끊임 없는 대교난을 거쳐 형극의 길을 더듬어 왔다. 이에 대해 宣敎史의 대가 로빈슨은 “고대 로마 제국의 교인들이 19세기 초의 70여년간에 겪은 조선 교인들만큼의 수난을 겪었을까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같다”고 했으며 춘원 이광수도 “내 혈관에도 이러한 순교자의 피가 흐르거니 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긍지를 느낍니다.”하고 말한바 있다. 그야말로 ‘순교의 숭고한 행군’은 한국 천주교회의 길이었다.
조선 천주교의 신앙형태의 특징으로 첫째, 이 교회는 오랜 역사적인 과정을 경과 하면서 처음에는 세자나 석학들의 반열에만 소개되었던 서학으로서의 종교가 중류층을 거쳐 서민층의 하류까지 내려가 신앙의 사회계급 구조가 변모해 갔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천주 교회는 민족적인 주체의식이나 민족 전통에 접속됨으로서 이조적인 기독교로 형체화 되었다. 한글로 된 숱한 종교 서적과 문집이 출간되므로 확실히 민족 종교로 강력한 방향설정이 되었다. 셋째로는 신앙이 하류와 선민 층으로 파고 들면서 숱한 교난으로 인한 교회 신앙이 음성화 되고 교권 교회가 성립되지 못하는 가운데 격정적이고 종말론적인 위기의식의 신앙형태로 변천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천주교 자체의 특징을 보면 첫째 카톨릭 교회의 바탕인 교회적인 교권교회의 성립을 성사시키지 못했으며 둘째로는, 이 교회가 聖事나 교리의 기독교로 소개되어 성서적, 복음적인 신앙이 결여 되어 있어 합리적, 체험적 신앙이 부족했고 은총과 종교적 계시의 신비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수난으로 인해 참여의식의 둔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沒民族的 인상이라는 것이다. 침공 선박에 향도로 탑승하였던 선교사나 교도들의 행실은 민족 주체의 역사에서는 양해될 여지가 없었다.
이 조선 천주교회는 그 다음 시기에 도입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와는 아무런 역사적 연결점이 없다. 한국 교회사 속에서 신구교는 단절되어 있다. 이 두 종교 사이에 최소 공약수가 있다면 그것 은 하류층의 신앙 심리와 신비적 경건과 고난의 신학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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