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전한후에 버림을 받을 수 있는가?(구원은 취소 될 수 있는가?)
킵바이블
KeepBible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www.keepbible.com
사전:
고전 9: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9:27 But I keep under my body, and bring it into subjection: lest that by any means, when I have preached to others, I myself should be a castaway.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을 기념하고 젊은이들을 훈련해서 전쟁에서 잘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경기를 만들었다. 이런 경기들은 지정된 곳에서 정한 시간에 큰 나팔소리와 함께 열렸으며 왕과 유명 인사들이 참가하였다.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월계관을 수여하였다. 여기에 참가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으며 선수들은 모든 것을 절제하여야 했다. 이 중에서도 고린도에서의 경주는 아주 유명하였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그런 것을 말한다(고전9:24-27). 달리기 외에도 여러 경기가 있었지만 달리기가 가장 큰 관심을 끌었다. 달리기는 그리스도인의 싸움과 희생과 계속해서 몸을 복종시키는 것과 모든 무거운 짐을 치우는 것 그리고 경주를 관람하는 수많은 관중을 잘 보여 준다. 이런 관중들 가운데는 이전의 승리자들이 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영광의 상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한다(빌3:13; 딤후4:7-8; 히12:1).
질문에 대한 댓글
답변자: 김재욱
그런 분들은 설득으로 해결이 잘 안 됩니다. 말씀을 잘 쪼개고 나누어 봐야 하는데 그런 방식을 잘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국어를 잘 이해하는 것은 성경 이해의 기본입니다. 오른쪽 추천서비스에 국립국어원이 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개별적인 단어나 표현들을 전체로 확대 해석하는 것이 일단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고 일회적이며 흔들리지 않는다는 더 크고 기본적인 교리를 확고히 알고 나머지를 해석해야 하는데,
부수적인 구절들로 더 뿌리가 되는 교리들을 흔들려 하는 접근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물론 그분들은 위 구절들에 대한 해석도 주의 깊게 보지 않습니다.
고후 13:7 경우 버림받은 자같이 '될지라도' 등의 표현이 가정을 전제로 강조하는 것이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Study5/View/3Ma
<성경 바로 보기> 같은 책을 잘 읽어 보시면 다 나옵니다.
또한 시대와 수신자 등을 잘 구분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 24:13) 이런 구절도 나름 세심히 보고,
끝까지 못 견디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이니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환난 때 남은 자들이 받는 고난을 말씀하신 것이며 여기서의 구원도 육체적 죽음에서 육체가 구원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교회 시대의 신약 성도들의 영혼 구원 문제에 적용하면 안 됩니다.
그밖에 살아 있는 자들을 기록한 생명책에서 지우는 이야기를 오해하기도 하고,
어린양의 생명책과 혼동하는 등의 문제로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개역성경의 오역과 부실함으로 빚어지는 오해도 많습니다.
한 예로 엡 2:22 말씀을 보십시오.
킹흠정역 : 그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처소로 함께 "세워져 있느니라." (과거형)
개역개정 :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진행형)
이미 끝난 일을 아직도 마무리가 안 된 것처럼 보이게 해놓았습니다.
이건 번역자들의 생각이 담긴 것이지, 영어를 몰라서 이렇게 해놓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구절들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주의깊게 볼수록 더 헤매게 되겠지요.
구원의 오해 문제를 짚으려면 책을 한 권 써야 할 것입니다.
<구원 바로 알기> 책이나 강의, 또 이 사이트의 설교와 성경공부에 여러 번 등장하니 차근차근 알아 보시기 바랍니다.
===
내 몸을 쳐야 하는가?
고대로부터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자기 몸을 혹사시키거나 참기 어려운 고행을 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집트의 이시스, 로마의 키벨레, 그리고 에베소의 다이아나같이 피에 굶주린 여신들을 위해 사람들이 피의 제전을 열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천주교회의 수도사들 가운데는 자기 몸을 극도로 상하게 한 사람들이 많았고 루터 같은 경우도 이런 일을 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되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영적으로 높은 상태에 다다르기 위해 고행이 필요하다는 이교도들의 교리를 지지한다.
개역: 내가 내 몸을 쳐(I beat my body)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한국 성도들에게 보상 심리를 허용하면서 많은 은혜를 끼친 이 구절은 실제로 나를 때리라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는 ‘치다’(beat)라는 뜻을 갖는 그리스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후포피아조’(hupopiazo)이며 실제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흠정역: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바울 사도는 육체의 정욕들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하였으며 이것은 갈5:16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자기를 치는 행위’ 즉 자학 행위는 특히 왕상18:28에서 잘 드러나는데 거기서 바알의 대언자들은 자기들의 방식에 따라 자기 몸을 자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코 성경의 개념이 아니다.
흠정역: 참으로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가 있는 것 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골2:23).